[횡설수설]최화경/스포츠의 힘

  • 입력 2002년 8월 5일 18시 27분


1978년 방콕아시아경기 때 얘기다. 남자농구팀 주전 센터인 신선우 선수가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려 몸이 불덩이가 됐다. 당장 입원해야 할 상태였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었으니까. 밤새 대책회의를 한 다음날, 경기장에 느닷없이 산소통이 등장했다. 신 선수는 산소 호흡기를 쓰고 누워 있다가 상황이 급하면 나가서 뛰고, 힘들면 다시 들어와 눕고…. 북한의 기권으로 이기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었다. 북한과의 스포츠 대결이 ‘전쟁’으로까지 표현되던 때의 일이다.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는 남북 스포츠 교류의 효시다. 대결 일변도를 벗어나 처음 공동 응원이 펼쳐진 게 바로 이 대회다. 이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통일축구대회가 열렸고 이듬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꿈에도 그리던 단일팀이 성사됐다. 도쿄올림픽에 단일팀을 구성하라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권고로 첫 남북체육회담이 열린 게 1963년이니 근 30년 만에 단일팀이 탄생한 것이다. 한반도기를 나란히 단 남북의 현정화 이분희선수가 세계 최강 중국을 꺾던 그 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2년 전 시드니올림픽 때는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입장했다.

▷근대 올림픽 100년사를 통틀어 스포츠 교류의 가장 큰 개가는 무엇일까.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를 꼽는 이도 있지만 그보다는 분단 독일의 올림픽 단일팀을 더 친다. 1956년 멜버른대회부터 1964년 도쿄대회까지 올림픽에 내리 세 차례 동서독 단일팀이 출전했다. 이를 위해 열린 체육회담만도 200차례가 넘는다고 하니 그렇게 하면서 쌓인 상호 이해가 훗날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흑인 탄압으로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흑백 혼성팀을 출전시키면서 인종차별국의 오명을 벗었다. 바로 올림픽의 힘이다.

▷북한이 다음달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아경기에 참가한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열린 국제대회엔 한 번도 출전하지 않았던 북한이기에 남북 스포츠 교류 50년 사상 가장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성화를 채취해 판문점에서 합화(合火) 행사까지 갖는다니 남북한 정기가 한데 뭉치는 대회이기도 하다. 이 대회를 계기로 그동안 북한이 보여온 ‘도발 따로, 화해 따로’식의 태도가 사라졌으면 한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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