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허 선생은 ‘빈처’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술 권하는 사회’ 등 주옥 같은 단편을 통해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비애와 민족적 현실 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는 또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던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표석만 있는 옛 집〓부암동사무소를 끼고 인왕산 자락을 따라 주택가 골목을 10분쯤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허름한 기와집이 나타난다. 주소는 부암동 325의 2.
9일로 탄생 102주년을 맞는 빙허 선생이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이후 역사소설 ‘무영탑’과 ‘흑치상지’ 등을 집필한 곳이다.
현재 이 집은 기와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아 지붕의 붕괴를 막기 위해 얽어놓은 검은 색 천막이 둘러쳐져 있다.
또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마당에는 깨진 기와만 쌓여 있으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녹슨 자물쇠들로 채워져 있다. 담도 없어 인근 주민들이 마당을 주차공간으로 활용중이다.
올 4월 서울시가 이 집 마당 입구에 설치한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빙허 선생은 이 집에서 생계를 위해 닭을 쳤었다. 그러나 염상섭 박종화 홍명희 등 당대의 문인들이 모두 자하문 안팎에 살면서 이 집에 들러 닭을 잡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바람에 100마리로 시작한 양계 사업이 곤경에 빠졌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그는 동대문구 제기동의 초가로 옮겼으나 1943년 지병인 폐결핵이 장결핵으로 악화돼 숨졌다.
▽“문화재적 가치는 없다”〓서울시는 1994년과 1999년 등 두 차례에 걸쳐 이곳을 시 지방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검토했으나 문화재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건물 자체는 보존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았으나 집터의 의미는 알릴 필요가 있어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이 집의 현재 주인은 빙허와 관계가 없는 사업가로, 형편이 어려워 집을 방치해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뜻 있는 사람들이 모금이라도 해서 이 집을 사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기념관은?〓주변에서는 당대 최고 문학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이 공간이 흉가로 방치돼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 집에서 불과 100m 거리에 사무실을 둔 ‘지속가능개발네트워크 한국본부’ 이기명(李己明) 사무처장은 “방치된 집이 우리 문화 수준의 미흡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이 같은 장소는 정부가 예산을 배정해 ‘빙허 기념관’ 등으로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전성태(全成泰) 사무국장은 “빙허 선생의 대구 계산동 생가와 ‘빈처’의 산실인 서울 관훈동 고택 등은 모두 흔적없이 사라져 이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부암동 집이 유일하다”며 “서울시가 건물 자체의 가치만을 따져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고 표석만 설치한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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