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율 최악…승자는 없다▼
1965년 재·보선 이후 최저 기록인 29.6%의 투표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유권자의 냉담한 태도는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하면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는 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 선거 참여를 유도했으나 유권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낮은 투표율을 보인 것은 휴가철이라거나 악천후, 평일 선거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권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표출된 결과일 뿐이다.
월드컵 4강 이후 K리그는 100만 관중을 넘어서고 있는 것을 정치권은 알고 있는지. 활기차고 투지 넘치는 페어플레이에 힘찬 응원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서로 치고 받으며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잘못을 수긍하고 반성하기는커녕 남의 탓으로 돌리고 은폐하려는 모습에 어느 국민이 박수를 보내겠는가. 장상 전 국무총리지명자가 정부청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정치권은 재·보선 결과를 단순히 승리와 패배, 대선정국의 유불리 차원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열린 자세로 국정을 논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공세의 수위를 높여 대선 가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하기보다는 산적해 있는 민생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오히려 대선에 유리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공적자금이나 권력형 비리의 처리도 현 정부를 압박하고 몰아세우기에 급급하면 정국은 경색될 수밖에 없다. 정책실패와 권력형 비리를 막을 수 있는 건설적인 개선책을 모색하기 위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행정부와 민주당에 대립각을 예리하게 세우기보다 다수당으로서 국정을 의연하고 푸근하게 이끌어감으로써 국민의 시선을 정치로 되돌리게 할 수 있다면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민주당 또한 신당 창당으로 대선 정국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전략을 재고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당의 이름을 바꾸고, 노풍(盧風)이 수그러들자 후보 교체를 위해 신당 창당을 꾀하는 것으로 유권자의 환호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정당의 체질 개선을 위한 노력이나, 새로운 정책 비전의 제시 없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개혁신당, 통합신당의 논의는 정파 간의 힘 겨루기로 비칠 뿐이다. 친(親)노와 반(反)노, 그리고 중도세력과 당 주변 제3세력의 이합집산 과정이 과연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정치불신을 더욱 심화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더군다나 반(反)이회창 전략의 일환으로 ‘모두 헤쳐 모여’ 식의 신당 창당은 현 민주당의 정체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강과 정책노선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사람 모으기에 급급한 나머지 정당의 뿌리를 잃게 된다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된다.
▼꿈과 희망의 정치 만들자▼
현실적으로 12월 대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미 표의 향방을 결정한 지지자를 관리하기보다 우리 정치에 싫증을 느껴 외면하고 혐오하게 된 유권자들을 정치의 장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과반수 의석 확보로 공세의 수위를 높이거나, 신당 창당으로 정치권이 안개 속에 휩싸이게 될 때 정치 불신은 깊어만 갈 것이다.
이번 재·보선의 진정한 승자는 없다. 국민이 외면한 승자는 승자가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또다시 애써 외면해버리려는 정치권은 정말 곤란하다. 정치는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월드컵 4강 신화로 하나된 국민은 정치에서도 꿈이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12월 대선에서는 진정한 승자가 나타나야 한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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