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 애써 이루어 놓은 일을 무산시키고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반복하는 듯이 보여 마치 시시포스의 신화를 읽는 듯하다. 정작 가장 중요한 군사문제에 관해서는 군사당국자간 회담의 조속한 개최에 대한 원론적 확인 외에 아무것도 없어 맥빠진다. 더욱이 북한 대표가 읽은 성명서에는 남북이 자기측의 군사당국에 대해 회담을 건의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어 원론적 합의에 대해서도 발뺌하는 듯해 당혹감마저 느껴진다. 따라서 정부는 이번의 남북 합의를 자신의 공으로 돌리기가 좀 쑥스럽지 않을까 여겨진다.
▼합의사항 대부분 잔치성격▼
남북한간의 합의가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동안 북한과 관련해 주목받아야 할 다른 두 가지 소식이 살짝 가려져 눈길을 끌지 못했다. 하나는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핵사찰에 대한 북한의 거부 문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함께 놓고 보면 이번 남북 장관급 회담의 어정쩡한 성격에 대한 풀이가 가능해지는 듯해 흥미롭다.
우선 식량지원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남북 장관급 회담에 선뜻 응한 이유가 읽히는 듯하다. 즉 대북관계, 특히 평화정착 문제와 관련해 어떤 가시적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는 남한 정부에 대해 장관급 회담의 개최라는 선물을 안겨주고 그 대가로서 식량지원을 얻으려는 실리적 고려가 읽혀진다. 오래 전부터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이 나쁠 이유는 없지만 선의의 지원에 대한 응답치고는 너무 옹졸하고 속이 읽히는 듯 싶어 선의를 베푼 측이 오히려 쑥스러워지는 느낌이다. 답보 상태에 들어갔던 최근의 남북 관계를 단순히 ‘우발적’ 교전의 우발적 결과로만 볼 수 있을까.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선물이 고맙게 느껴지도록 만들기 위해 남북관계를 의도적으로 냉각시켰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현재 북한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심각한 경제난과 극복이 불가능한 남북한 발전 격차로 인한 정권·체제 붕괴의 위기감이 상당할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을 극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리라는 것도 쉽게 추측된다. 방법면에서는 기술적 개혁이라는 점진적 방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주어진 정치 및 사회경제 체제의 근본적 변혁 없이 총체적 위기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북한 당국자들이 더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북한은 대량살상무기의 보유를 부인하고 있지만 이러한 무기의 위력은 존재가 실제로 확인되거나 사용을 하지 않더라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자아냄으로써도 발휘된다. 북한이 핵사찰을 거부하는 것은 핵보유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불안감을 십이분 이용하겠다는 의도로도 볼 수 있다. 핵무기가 있든 없든 사실이 확인되면 ‘핵 엄포’의 효과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어쩌면 북한으로서 핵사찰을 거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쉽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北 실리작전’에 끌려다녀서야▼
남북 간의 교착상태를 보는 남북한의 자세에는 너무 큰 차이가 보여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불안스럽기까지 하다. 남한은 그것을 깨는 데 몰두하는 반면 북한은 그러한 남한의 자세를 잘 알고 자신의 실리 확보와 연결해 강경과 온건의 자세를 마음대로 취한다. 한쪽으로는 이러한 답보상태를 지속시키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무기 개발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군사문제를 남북한 대화의 의제로 삼는 점에 대해 북한이 애써 피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북한이 남한과의 대화에서 보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두 가지 문제 가운데 하나를 보게 된다. 다른 하나는 물론 경제적 지원의 필요에 관한 것이다.
이번 7차 장관급 회담에서 발표된 10개항의 합의사항은 이 두 가지 점에 대한 확인을 빼고 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잔치적 성격의 일들에 관한 것이다. 과연 몇번의 ‘우발적’ 충돌과 장관급 회담에서의 합의가 더 반복될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박 상 섭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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