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02…삼칠일 (1)

  • 입력 2002년 8월 19일 18시 37분


삼나무 집에서 하얀 사람 그림자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새벽 세 시, 첫닭은 아직 날개 속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고, 아침밥을 준비해야 할 여자들도 베개에 머리를 얹고 잠들어 있다. 사람 그림자는 하얀 적삼과 속치마 차림의 여자였다. 여자는 우물가에 몸을 구부리고 바가지로 물을 퍼서 조심조심 항아리에 옮겨 툇마루에 놓았다. 그러고는 뱀처럼 스르륵 옷을 벗어 무궁화 가지에 걸더니, 머리에 손가락을 넣어 댕기머리를 풀었다. 물결치듯 엉덩이 아래까지 흘러내린 검은 머리는 여자의 하얀 알몸을 더욱 하얗게 부각시켰다.

여자는 물을 퍼서 머리에 뒤집어쓰고, 또 퍼서 뒤집어썼다. 단박에 하얀 피부가 얻어맞은 것처럼 빨갛게 물들었지만 여자는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온 마음으로 물을 퍼부었다.

파란색 치마 저고리와 쓰개치마로 옷을 갈아입은 여자는 안방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제사상에 정화수와 미역국과 흰쌀밥 세 공기와 위패를 올려놓고, 성냥을 그어 초에 불을 붙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조상님께 비나이다 그 사람의 아이를 갖게 해주시소 아무쪼록 사내아를 갖게 해주시소.

여자는 커다란 보자기 꾸러미를 껴안고 강가 길을 서둘러 걸었다. 첫닭과 개가 짖기 전에 용두산에 올라 샘물이 솟는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비밀리에 치성을 드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아무도 모르게 다녀와야 하는데. 너무 어둡다. 하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걸을 수는 있다. 앞으로 앞으로 서두르는 나의 혼이 횃불처럼 내 앞길을 비춰주고 있으니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물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집도 나무도 꽃도 사람도 모두 가라앉아 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아내도 그 사람의 자식들도 모두 모두. 그러나 실상 가라앉아 있는 것은 나 혼자다. 내 목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는다. 살려달라고 외쳐봐야 수면위로 거품이 떠오를 뿐. 그 사람의 아이를 낳으면, 그 사람을 꼭 닮은 사내아이를 낳으면, 물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양수와 함께 밀려나와 첫울음을 울 때, 내 목소리도 틀림없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늘 침묵을 남기고 간다. 나는 그 침묵에 몸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다. 내가 얼마나 말을 않고 있는지, 그 사람은 생각해 본 적도 없으리라. 무릎을 꿇고, 무릎을 껴안고, 무릎을 벌리고 그 사람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양동이 속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릴 뿐.

글 유미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