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 입력 2002년 8월 23일 17시 24분


무하마드 유누스 - 사진제공 세상사람들의책
무하마드 유누스 - 사진제공 세상사람들의책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 무하마드 유누스 지음 정재곤 옮김 / 384쪽 1만3000원 세상사람들의책

가난은 죄도 아니지만, 단지 ‘불편한 일’로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안됐지만, 사람이 죽는 데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굶어 죽는 것 만큼 끔찍한 일이 없다고 한다. 죽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란다. 매초 매초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상상해보라.

우리 남한은 다행히도, 열심히 땀흘려 일한 덕택에 짧은 시간에 절대 기아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아직도 지구 상의 많은 나라 사람들은 굶주림의 고통에 놓여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 돈으로 48만원(370달러), 총 인구 1억3000만명의 36%가 극빈선 밑에서 허덕이고 있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의 이 나라 사정은 더 참혹했다.

미국 반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인 치타공대학의 교수가 되어 금의환향한 무하마드 유누스(1940∼).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교수였던 그는 1974년 자기 나라에 닥친 거대한 기근 앞에서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늙은이는 어린 아이처럼, 어린아이는 노인처럼 변해 버리는 굶주린 사람들의 모습, 대문앞에 뒹구는 시신들. 부족함없이 잘 먹고 잘 살던 그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경제학의 아름다움을 가르쳤던 일에 환멸을 느낀다. 길바닥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도대체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책과 대학을 내팽개치고 진짜 경제를 알기 위해 대학 가까이 있는 작은 마을(조브라)에서 다시 ‘학생’이 되기로 맘먹는다. 마을은 그의 새로운 대학이었고 마을사람들은 그의 새로운 교수들이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이 고리대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수피아 베굼이라는 중년 여자가 하루종일 대나무 의자를 만들어 벌어 들이는 수입이 단돈 50페이사, 미국 돈으로 2센트밖에 안되었다.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내는 원금과 이자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봤자 늘 똑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1976년 그는 마을에서 제일 빚이 많은 사람 42명을 골라 빚과 원금에 해당하는 27달러를 ‘여유가 되면 갚으라’는 말을 하면서 나눠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선은 가난을 구할 수 없다, 감정에 이끌린 개인적 차원의 해결이 아닌 뭔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수는 없을까?

가난한 이들에게 담보 없이 오로지 신용하나만으로 소액의 돈(한 건당 150달러 미만)을 꿔 주는 소액융자, 이른바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 방식’으로 방글라데시 인구의 10%가 넘는 240만 가구의 운명을 바꾼 ‘그라민 은행’은 그렇게 태어났다.

1983년 만들어진 이 은행은 이제 전국에 1175개의 지점에서 직원 1만2000여명이 240만명에게 1600억 타카(약 3조 3600억원)를 융자해 주는 대형 은행으로 컸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미국 캐나다 프랑스 핀란드 등 60여개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1995년 방글라데시 그라민 지점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여사. 클린턴 부부는 지금까지 그라민 은행 소액융자의 한결같은 지지자들이라고 한다. - 사진제공 세상사람들의책

이 책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가’는 그의 자서전이다. 그의 삶은 우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자존과 생명까지 잃는 현실을 개선하는데 노력한 한 인간의 휴머니즘에 관한 기록이다.

‘명석한 경제학자들은 대개 가난이나 기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경제가 발전하면 자연히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이란 통계수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집단수용소처럼 따로 격리되어 살아가는 부류가 아니며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소액융자는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인간적 자산을 일깨우는 수단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꿈을 일깨움으로서,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 존엄성과 존중의 마음을 갖도록 만들고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삶은 또 빈곤타파를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로 해결하려 한 현실주의자의 꿈과 희망의 실현기록이다.

‘나는 떠들썩한 구호나 무슨 ‘주의’의 포장을 한 이론들을 배격하려고 언제나 노력한다. 언제나 실용 정신을 간직하려고 애쓰는 한편, 미래 지향적인 비전을 잃지 않으려 한다. 나는 세계를 단순히 좌, 우익으로 구분해 보려는 사고방식에 따르면 자본주의자가 아니지만 시장경제 테두리내에서의 자본의 힘을 굳게 신봉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본주의자다.’

이 책은 또한 진정한 성공은 기존의 무수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깰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도전과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융자를 위해 반드시 담보가 필요하다는 기존 관행을 없애기 위해 그가 도입한 방식은 최소 4인이 그룹을 지어야 융자가 가능하게 하는 연대융자 시스팀. 내가 돈을 갚지 못하면 남이 손해를 입는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갚을 리 만무하다는 우려를 뚫고 ‘가난한 사람들도 은행의 혜택을 입어야 한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융자는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는 성선설적 희망을 갖고 마침내 상환율 98%라는 놀라운 기록을 이룩한다.

고리대금 문제는 70년대 방글라데시의 문제만은 아니다. 500만원의 카드 빚을 갚지 못해 가공할 살인을 저지르고 자기 신체 일부를 담보로 삼아 돈을 빌리는 원시적인 일들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라민 은행 프로그램을 당장 우리에게 적용시킬수 있을지의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돈 빌리는 문턱을 낮춰 은행을 부자뿐 아니라 빈자의 것으로도 만든 방글라데시의 예는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천지인 세상에서 가난한 다른 사람을 위해 도전하고 투쟁해 가는 한 사람의 휴먼적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는 지를 엿보는 것은 감동인 동시에 부러운 일이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사족〓번역 탓이 아니라 원 텍스트의 문제겠지만 구성이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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