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창]최화/새치기는 국가보안사범

  • 입력 2002년 8월 23일 18시 22분


한국의 교통질서 수준은 그리 낮은 것이 아니다. 주로 선진국을 여행한 사람들이야 펄쩍 뛰겠지만, 중국이나 인도 같은 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차를 몰고 다니던 어느 목사님이 갑자기 차를 팔면서 “성질이 더러워져서!”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저간의 사정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골목길에서 불쑥 튀어나와서 간 떨어지게 하기, 새로 진입하려는 도로로 삐쭉삐쭉 차 머리 디밀기, 지나가는 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갑자기 차도쪽 문 열기, 전 차로의 독점권을 가진 듯한 치외법권적 버스들의 무소불위, 1차로로만 달림으로써 빨리 가는 차 방해하기, 그리하여 가장자리 차로가 오히려 가장 빠른 차로가 되는 기현상 만들기,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되어버린 오른쪽으로 추월하기, 차로 변경 신호를 하면 재빨리 따라붙어 진입을 방해함으로써 차라리 신호하지 않는 편이 더 낫게 만들기, 절대 양보하지 않기 등등. 지면이 허락지 않아서 그렇지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이 같은 현상들의 원인은 대체로 자기 객관화 능력 부족, 면허발급 시의 질서교육 미비, 청소년기를 입시경쟁으로 보낸지라 아무데서나 발휘되는 지고는 못 사는 경쟁심, 나날의 삶의 어쩔 수 없는 각박함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쉽진 않겠지만 그 원인을 없애거나 줄임으로써 점차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행위들과는 그 질이 전혀 다르고, 매우 악성인 행위가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치기(일명 끼어들기)다. 한국의 교통질서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이 새치기의 현장에서 입증된다. 거의 대부분의 차들이 일렬로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을 우리는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장엄한 기다림의 행렬은 그러나 몇몇 미꾸라지들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사실 운전을 몇 년 해본 사람은 새치기란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기다리는 그 질서의식을, 새치기하는 차량들은 여지없이 짓밟고 유린한다. 그들을 잘 살펴보라. 버스나 택시(누가 이들의 난폭 운전을 막겠다는 대통령 후보가 나온다면 찍을 참이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이른바 크고 비싼 차들이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는지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필자는 여러 번 그들과 싸워봤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얼마나 멀쩡한지 잘 안다. 그 멀쩡한 얼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다녔을지, 꼭 봐야만 아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플라톤의 ‘국가론’에는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유명한 사주덕론(四主德論)이 전개되고 있다. 뼈대만 말하자면, 각자가 자신의 본분에 따라 지혜, 용기, 절제를 발휘하면 국가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그것은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이다. 철학적으로는 과연 국가와 개인 사이에 유비(類比) 관계가 성립하느냐 하는 중대한 논쟁거리가 있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국가를 논하면서 왜 정의의 문제를 들고 나왔느냐에 있다. 그것은 한 국가의 존립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의이며, 그것이 무너지면 국가 아니라 그 어떤 사회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가장 근본적인 통찰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정의란 사실 철학이 사회에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다. 개인의 가치는 행복이나 그 밖의 다른 것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정의가 서지 않으면 그 모든 개인의 가치는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개인을 논하기 전에 먼저 국가의 정의를 논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정의는 항상 나눔(분배)과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각자가 자신의 본분을 다하라고 한 플라톤의 말도 자신의 몫, 즉 배분된 바의 것을 다하라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때 나눔의 대상은 반드시 적극적인 것만이 아니고, 소극적인 것, 즉 고통일 수도 있다.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는 긴 차량의 행렬은 각자 고통의 몫을 감수하고 있는 정의의 행렬이며, 사회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바로 우리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엄숙한 의식이다. 그것을 깨는 것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국가와 사회의 존립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다. 국가보안사범이라는 말을 바로 그런 행위에 적용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에 쓸 것인가.

최화 경희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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