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쌀 개방유예 재협상 2년 앞으로

  • 입력 2002년 8월 26일 18시 30분



【“다음 정권은 2년짜리 정권이 될지도 모른다.”(정부 고위당국자)

2004년 쌀 개방(관세화) 유예기간 연장 협상을 전후해 나타날 농민 반발로 차기 정부는 엄청난 홍역을 치를 것이라는 뜻이다. 정부는 쌀 재협상에 따른 충격을 줄이기 위해 쌀농업 구조조정에 나섰으나 이미 실기(실기)했다는 지적이 많다. 쌀 농업의 구조를 바꾸려면 길게는 십수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부의 권장정책만 믿고 쌀농사를 늘려온 농민들은 거세게 반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뒤늦은 구조조정 정책이나마 제대로 시행될지 의문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농민표를 의식해 인기 없는 구조조정정책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크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쌀 재협상의 전망과 논란 등을 종합 점검해 본다.】

▼세계화 波高에 정책표류 농민만 한숨▼

1999년 한국산 쌀의 t당 수매가는 1467달러로 미국 쌀 수출가격의 2.9배, 중국 쌀의 4.1배였다. 2년 뒤인 지난해 한국 쌀의 수매가는 미국산의 5.5배, 중국산의 5.9배로 격차가 더 커졌다.

이 격차는 앞으로도 줄어들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경원(李庚沅) 농협 조사부 조사역은 “쌀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려면 영농규모를 늘리고 토지가격을 낮추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데 국토가 좁은 한국으로선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경쟁력은 없는 반면 쌀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다. 지난해 전국 135만 농가(393만명)의 소득 가운데 쌀 소득이 평균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은 25.3%, 농업소득 대비 쌀 소득의 비중은 53.9%였다.

사정이 이러해 2004년 쌀 재협상은 한국농업을 뿌리째 뒤흔들 ‘메가톤급 시한폭탄’으로 꼽힌다.

▽쌀 시장 지킬 수 있나〓이호중(李浩重)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부장은 “쌀 관세화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고,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을 늘리는 등의 반대급부도 줘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많은 농업전문가들도 이런 주장의 당위성에는 동의한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현재 진행중인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 등에서 미국 등 농산물수출국들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시장개방 요구 강도를 높이고 있다.

민승규(閔勝奎)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UR협상 때 같은 처지였던 일본이 1999년 관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국은 외톨이 신세”라면서 “관세화를 유예받기 어려운 것이 객관적인 현실”이라고 말했다.

어렵게 관세화 유예에 성공한다 해도 쌀 시장에 대한 충격은 불가피하다.

UR 협정문은 ‘한국이 관세화를 추가로 유예받으려면 회원국들이 수용할 수 있는 추가적인 양허(讓許)를 제공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정환(李貞煥)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원장은 “관세화 유예 대가로 상대국들은 한국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내세울 것”이라며 “한국의 사정이 절박할수록 요구가 더 거셀 것”이라고 내다봤다.

협상상대국들이 요구할 가능성이 큰 관세화 추가유예 대가는 MMA 확대. 한국은 UR협상에서 쌀 관세화를 유예받는 조건으로 MMA물량을 95년 국내소비량의 1%에서 2004년 4%로 늘리기로 약속했고 이를 이행하는 중이다. 재협상에서 MMA물량이 크게 늘면 지금도 재고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쌀 시장은 관세화에 못지않은 충격에 휩싸일 전망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뭐했나〓정부는 1990년대 초반 UR협상 타결을 앞두고 쌀 시장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통일쌀 수매중단과 신(新)농정 5개년 계획발표 등 급진적인 감산(減産)을 추진했다.

그 결과 91년 120만㏊이던 쌀 생산면적이 95년에는 105만㏊로 줄었다. 또 쌀 생산량은 91년 3793만섬에서 95년 3260만섬으로 감소, 1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쌀 재고가 바닥나자 정부는 정책을 180도 바꿔 증산(增産)정책을 숨가쁘게 쏟아냈다. 96년에는 일부 휴경 논의 벼농사를 의무화했고, 시도별로 쌀 생산량까지 책정했다. 쌀절약 운동까지 정부가 나서서 벌였다. 현 정부는 증산정책에 더 박차를 가했다.

‘브레이크 없는’ 증산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호응으로 쌀 생산면적은 다시 늘었다. 생산량도 2000년 3674만섬으로 95년보다 414만섬이나 증가했다. 반면 1인당 쌀 소비는 91년 116.3㎏에서 한해도 예외없이 감소해 2000년 93.6㎏까지 떨어졌다.

여기에 MMA물량까지 가세하면서 재고가 급증했다. 정부는 뒤늦게 2000년 말 증산정책 포기를 선언했고 최근에 와서야 본격적인 감산에 나서고 있다.

▽쌀 산업 구조조정 제대로 될까〓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는 올 6월 ‘쌀산업 종합대책’을 내놓고 구체안을 마련하고 있다. 대책의 주요 내용은 쌀값을 떨어뜨려 국제가격과의 격차를 줄이고 감산을 유도하는 것이다. 협상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충격에 견디는 쌀 산업구조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이에 대해 민승규 수석연구원은 “생산주기가 1년인 쌀 산업을 구조조정하려면 10년 정도의 장기계획을 갖고 꾸준히 추진해 왔어야 한다”면서 “때늦은 대책”이라고 평가했다. 더 큰 문제는 일관된 원칙 없이 상황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반복해온 정부정책의 신뢰성은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는 점.

김휘승(金輝承)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실 대리는 “장기적인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이제 와서 갑자기 쌀값을 시장기능에 맡기고 감산을 하겠다는 정부를 어떤 농민이 믿고 따르겠느냐”고 반문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과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각각 다음달 11일과 9일경 ‘전국 시군 농민대회’와 ‘김대중 정권 농정실패 규탄 400만 농민 총궐기대회’를 열고 정부의 일관성 없는 쌀 정책과 마늘파동 등을 비판할 예정이다.

▼94년 UR협정때 10년간 개방 예외▼

◆관세화(關稅化) 유예=1994년 체결된 UR농업협정에 따라 모든 농산물은 비관세장벽을 철폐하고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 대신 관세를 매겨 개방충격을 줄이되 관세는 단계적으로 낮춰야 한다. 한국 일본 필리핀의 쌀과 이스라엘의 양고기 등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2004년까지 이 같은 관세화가 유예됐다. 한국은 2004년에 쌀의 관세화 유예 연장에 관한 재협상을 시작하고 끝마쳐야 한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김광현기자 kkh@donga.com

▼日,1256% 관세로 수입막아… 앞날은 험난▼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 환경이나 농민문제, 개방압력 등 쌀 문제에 관한 한 가장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나라다. 그러나 쌀 개방압력에 대비한 두 나라의 정책은 크게 달랐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본격화된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세계적인 흐름을 받아들여 장기대책을 세워왔다. 반면 한국은 정치논리에 휘둘려 허송세월만 했다.

일본 쌀 정책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95년. UR 협정이 93년 말 타결된 직후였다. 이때 일본 정부는 쌀 생산량 전부를 정부가 수매하던 ‘식관법(食管法)’을 포기하고 정부 비축미를 제외한 나머지 물량은 시장원리에 따라 매매하는 ‘식량법(食量法)’을 도입했다. 일반미 가격이 94년 이후 3∼6%가량씩 떨어졌고 97년에는 11%나 낮아졌다.

사정은 정부미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 일본 정부의 쌀 수매가는 UR 협상 당시인 86∼88년의 평균수매가보다 16.7% 떨어졌다. 한국 정부의 수매가가 같은 기간에 116%나 오른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다른 전환점은 조기 관세화 결정이 내려진 98년 12월.

일본 농림수산성, 자민당, 농협 등 3자는 2000년 말까지 유예됐던 관세화를 1년 8개월 앞당겨 99년 4월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관세 부과 방식은 ㎏당 341∼351.17엔을 물리는 종량세. 이를 종가세로 환산해 계산하면 무려 1256%에 이르는 고율(高率) 관세였다.

이에 따라 이후 실제로 일본에 관세를 물고 수입된 쌀은 99년 225t, 2000년 98t에 불과하다. 일본 쌀의 재고량이 99년 말 현재 271만t인 점을 감안하면 쌀 수입량은 사실상 ‘제로’인 셈이다. 쌀 수입이 이미 세계적으로 굳어진 대세라면 빨리 빗장을 열되 가장 유리할 때 열자는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에 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개방압력이 훨씬 강해져 도하 개발 어젠다(DDA)에서는 모든 농산물에 25% 이상의 관세를 못 붙이게 하자는 논의가 나올 정도다. 여전히 재고 쌀은 쌓이고 있고, 쌀값이 떨어지면서 농가소득이 줄어 계층간, 지역간 소득격차 문제도 있다.

농촌경제연구원 김태곤 박사는 “일본 정부는 유리한 시기에 높은 관세를 매겨 쌀 수입 충격을 흡수하고 있다”며 “반면 한국 정부나 정치권이 쌀 문제를 ‘정치용’으로 이용해 농업정책이 세계 흐름과는 거꾸로 가고 그 피해는 결국 농민에??돌아갈 형편”이라고 말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中, 한국시장등 겨냥 ‘자포니카’재배 늘려▼

중국 쌀은 한국 쌀 산업의 존립을 좌우할 가장 큰 변수다.

쌀은 8억명의 중국 농민이 생산하는 농산물 가운데 국제 경쟁력을 갖춘 대표적인 품목이다. 중국은 태국과 베트남에 이어 세계 3위의 쌀 수출국.최근 3년 간 중국의 쌀 수출량은 연 평균 300만t정도로 세계 수출량의 13% 수준이다. 세계 최대 수출국인 태국의 절반 수준이고 전통적인 쌀 수출국인 미국보다 많다.

양뿐만 아니라 품질도 위협적이다. 중국의 자포니카 품종은 한국, 일본 쌀과 비교해 품질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시장 가격은 한국 쌀의 7분의 1에 불과하다. 한국의 4분의 1 수준인 미국 쌀보다 가격경쟁력이 더 높다.

한국만 보면 쌀 시장이 부분 개방된 이후 1995∼2000년에 수입된 쌀의 76.1%가 중국 쌀이다.

특히 중국 정부는 쌀 정책의 큰 방향을 고품질, 세계화로 정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2, 3모작을 할 수 있는 저(低)품질인 인디카(안남미) 생산면적은 줄이는 대신 품질이 좋으면서 수출도 할 수 있는 자포니카의 생산면적은 크게 늘리는 추세다.

중국에서 자포니카를 주로 생산하는 지역은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 3성. 동북 3성의 쌀 생산면적은 79년 84만㏊, 85년 119만㏊에서 2000년에는 남한 쌀 생산면적의 2.5배인 264만㏊로 늘었다. 이곳에서 중국 자포니카의 80%가 생산된다. 이 지역은 아직 비료나 농약으로 오염되지 않은 토양에다 병충해나 태풍 피해도 적어 자포니카를 재배하는 환경이 한국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2004년 1월부터 쌀 관세화를 하면서 고율 관세를 붙이려고 하겠지만 330∼390% 수준을 넘지 못해 근본적인 가격경쟁력을 갖추기 힘들 전망이다. 대체 작물 마련 등 쌀 이외의 다양한 대책이 논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농촌경제연구원 농정연구센터의 정정길 박사는 “중국의 쌀농사는 기술혁신이 이뤄지면서 단위생산량이 급격히 늘었다”며 “생산 측면에서만 보면 한국은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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