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총리 후보는 지난번에는 시어머니가 다 해 잘 몰랐다, 이번에는 장모님이 다 해 잘 몰랐다고 한다. 복이 많으신 분들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진짜 이사를 다녔지만 귀하는 위장전입이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지난 세월의 ´평균 도덕성´▼
그렇게 청문회는 끝났고 전직 대학 총장과 언론사 사장은 총리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다. ‘복이 많던’ 두 사람으로서는 청문회에 오른 것이 생애 최대의 불행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대학 총장과 언론사 사장으로 있었으면 될 것을 공연히 사서 망신을 당한 꼴이 아닌가, 마음 한구석에 그런 후회가 있음직도 하다.
세상의 많은 ‘옷 입은 이’들이 ‘옷 벗은 두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도덕성이 형편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개중에는 두 사람을 비난하기에는 때가 너무 많이 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만그만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장모는 어디 땅 한 평이라도 안 사주시나’ 하는 사위나 ‘이재에 밝은 시어머니’를 부러워한 며느리도 있었을 터이다. 그들은 다만 옷을 벗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한 나라의 총리가 되려는 인물이라면 남다른 도덕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불법은 아니더라도 전국 곳곳의 부동산을 사들인 인물이 총리가 되어서야 공직사회에 영(令)이 설 리 없다. 그렇다고 고위공직자에 반드시 청백리가 요구되는 시대는 아니다. 깨끗하고 무능하기보다는 사회 평균 이상의 도덕성에 유능한 인물이 보다 현실적일 수 있다. 어려운 것은 ‘사회 평균의 도덕성’을 어떻게 계량하느냐는 것이다.
지난 30여년 세월 동안 한국 사회는 성장이데올로기에 몰입되었다. 어떻게 바르게 살 것인가보다는 어떡하든 잘 사는 것이 우선적 가치였다. 그러다보니 아파트 딱지 한두 번 사고파는 정도야 흔한 일이었고 목돈이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부동산에 눈을 돌렸다. 다들 그러려니 싶으니 특별한 잘못이라고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 정도가 지난 세월 우리 사회의 평균 도덕성이라고 한다면 심한 말일까.
보다 치명적인 요인은 권력과 정치권의 구조적 부패다. 군부 출신의 두 전직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끌어모았다. 민주화를 앞세웠던 민간정부라고 크게 나을 것은 없었다. 대통령 아들들을 비롯한 권력 측근들이 줄줄이 부패에 가담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수천만원, 수억원의 검은돈을 받고도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이라고 우겼다. 그러니 이번 국회 청문회를 두고도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느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아무튼 이번 청문회를 계기로 고위공직자의 도덕성이 높아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회 평균의 도덕성에 비추어 너무 엄격한 검증 잣대를 들이댈 때 과연 도덕성과 국정능력을 겸비한 인물을 쉽게 찾을 수 있을지는 당위성을 떠나 현실의 문제로 고려돼야 할 것이다. 도덕적 리더십은 총리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사회의 도덕성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권력 운용의 투명성부터 높여야 한다. 구체적 정치개혁으로 정치판을 맑게 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아무리 도덕성 있는 총리를 앉힌다 한들 사회의 도덕성이 높아지기 힘들다.
▼잃어버린 부끄러움▼
이호영(李鎬榮) 전 아주대 총장은 최근 펴낸 ‘부끄러움’에서 우리 사회가 부끄러움을 잃어버렸다고 개탄한다.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염치(廉恥)를 잃었다는 것이다. 염치를 잃었으니 무엇이 부끄러운 것이고 부끄럽지 않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시모 장모 맹모 얘기도 결국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데서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비단 특정 인사의 얘기가 아니다. 모두의 얘기일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잃어버린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됐다. 부끄러움이 자존심의 뒷면이라면 부끄러움 잃은 사회는 자존심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삶의 질이 높아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권측도 총리지명자 두 사람이 줄줄이 낙마한 것을 두고 국정이 흔들리네, 대외신인도가 떨어지네 하며 네탓 타령을 하느니 한 번쯤 잃어버린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전환기의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면 총리 부재(不在)의 국정 차질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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