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추적! 증시정보 흐름]돈되는 정보 개미는 캄캄

  • 입력 2002년 9월 1일 17시 59분



《‘유능한 펀드매니저는 리포트(기업분석보고서)를 읽지 않고 애널리스트의 아이디어를 낚아챈다’는 말이 있다. 투자정보가 공개되기 전에 가로채야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대다수 일반투자자들은 처음부터 불리할 수밖에 없는 불공정거래를 암시하고 있다. 기업의 투자정보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눠줘 증시 투명성을 높이려는 ‘공정공시제도’가 이르면 이달 중 시행된다. 투자정보 유통경로가 뿌리부터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불리한 정보의 공개를 꺼리는 기업의 비밀주의와 주요 고객에게 정보를 먼저 알려주는 애널리스트의 관행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공정공시제도 시행을 앞두고 투자정보가 투자자에게 흘러가는 경로의 문제점과 대안을 5회에 걸쳐 짚어본다.》

“한국 증시에서 개인투자자는 기업 실적을 근거로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없다. 실적 정보는 기관투자가에게 먼저 전달되기 때문이다.”

‘보초병’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사이버 애널리스트 박동운씨의 주장에 적지 않은 투자자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들이 실적이나 공시 대신 차트나 루머를 더 믿는 것이나, 한국 증시에서 데이트레이딩이 전체 거래량의 절반을 넘는 것은 다 이런 이유 탓이다.

기업이 정확한 정보를 제때 성실하게 투자자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건전한 투자문화의 정착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대한 모호하게〓디젤자동차 매연을 줄이는 장치(매연저감장치)에 관한 특허를 갖고 있는 A사는 95년 12월 이후 7차례나 관련 공시를 냈다.

내용은 ‘우리 회사의 매연저감장치가 ○○에서 특허를 받았다’는 것. 국가 이름만 한국 영국 중국 독일 미국 싱가포르 등으로 바뀌었을 뿐 ‘실용화를 추진 중’이라는 추가 문구까지 거의 비슷했다.

공시가 나올 때마다 매수세력이 늘어나며 주가는 꿈틀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가는 원위치로 돌아왔다. 아직까지 이 회사가 특허를 실용화했다는 이야기도, 특허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증권가에는 이처럼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공시가 많다. 이런 공시에는 ‘실제 사업전망이 어떻다’거나 ‘아직 실용화 단계가 아니다’라는 등의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최대한 멋있게 포장해 공시한 뒤 “판단은 투자자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근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중국 수출 및 투자 관련 공시. 동부증권 장영수 기업분석팀장은 “중소기업이 ‘중국에 물량 수백만개를 수출할 예정’이라고 공시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본다”고 말한다. 중국 수출 가운데 상당수는 재고 밀어내기 식의 수출일 가능성이 높아 기업이익을 높이는 데 영향이 거의 없다는 설명이다.

▽최대한 늦게, 최대한 은밀히〓실적을 최대한 늦게 발표하는 관행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현행 규정상 상장 및 등록 기업은 반기나 분기가 끝난 뒤 45일 안에 실적을 발표해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 기업이 45일 한도를 꽉 채운 뒤 최대한 늦게 실적을 발표한다는 점. 올해에도 반기 실적 발표 대상 1200여개 기업 가운데 무려 800개 기업이 마감일인 8월14일과 하루 전인 13일 발표했다.

실적을 집계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만은 아니다. 14일 증시 마감 이후인 오후 5시에 실적을 공개한 한 중소기업 주식담당자는 “사실 실적 집계는 7월 중순 다 끝났다”면서 “미리 발표하면 괜히 투자자들의 주목만 받고 귀찮은 일이 많아 일부러 늦게 발표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발표가 늦어지면 중요한 실적 정보가 은근슬쩍 밖으로 샐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부자들이 아는 사람들에게 슬쩍 전해주기도 하고 영향력 있는 기관투자가에게 흘리기도 한다. 기관투자가는 미리 주식을 사둔 뒤 실적 발표만을 기다린다. 실적이 좋아졌다는 발표를 믿고 개인투자자들이 몰려들어 주가가 오르면 기관은 가차없이 주식을 팔아 치운다. 불투명한 실적 발표 탓에 개인투자자만 손해를 입는 셈이다.

서울대 학생들의 투자모임인 서울대 투자연구회 김민국 회장은 “개인이 기업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공시와 실적 발표”라며 “기업이 이런 기본적인 정보마저 엉터리로 알린다면 개인투자자의 투자문화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비뚤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주요 정보를 제대로 알린 모범 사례
넥센타이어
-3년 연속 상장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주총
개최, 분기 및 반기 실적 가장 빨리 발표
-매월 실적 발표
한미약품
-제약업계 최초 기업설명회(IR)팀 구성
-실적 악화가 예상되더라도 미리 공개
삼성전기
-2001년 IR 33회 개최
KT
-주식 1000주 이상 보유한 주주에게 민영화
일정 등 주요 경영정보 수시로 제공
-1000주 이상 보유 주주에게 다섯 차례
경영현황 설명 책자 보냄
그 외 풍산 휴맥스 세원E&T 등 매월 실적
발표하는 기업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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