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15…삼칠일 (14)

  • 입력 2002년 9월 3일 18시 22분


눈을 뜨니, 어둠이었다. 머리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내 목소리가 아니다, 들어본 적 없는 여자의 목소리, 꿈속에서 낯모르는 여자가 비명을 질렀는지도 모르겠다, 내 귀를 끌어들여…, 아아, 더 자고 싶다, 다시 같은 꿈속으로 떨어질 것 같다, 유리 파편처럼 똑바로. 여자는 잠기운을 거역하여 눈을 뜨고 양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윗몸을 일으켰다.

문 창호지에 여자 모양 달 그림자가 비쳐 있었다. 나는 현실이란 물가를 등지고 저 물 한 가운데로 한 가운데로, 꿈으로 꿈으로, 흘러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물가를 떠난 것은 그 날 아침. 어머니도 아침에 죽었다는데, 갓 태어난 때라 아무 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 열여섯 살의 그 아침,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온다, 면서 집을 나선 아버지가 밀양강 용두목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은어 낚시배를 타고 용두목으로 갔지만 사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 꿈은 한 번도 꾼 적이 없다, 아버지가 혼이 되어 돌아온 적도 없다, 아버지의 목소리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온다, 그 마지막 말만 눈도 귀도 불편한 사람이 나무를 깎아내 만든 글자를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더듬듯 기억하고 있을 뿐. 아버지. 이 집의 어둠에는 여기에서 없어진 사람의, 과거 여기에 있었던 사람의 그림자가 스며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여자는 다시 윗몸을 누이고 어둠에 손을 뻗어 거기에 있었던 남자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수염 깎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콧방울을 손톱으로 더듬고, 콧대를 간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남자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 손이 스륵스륵 밑으로 뻗어 발목을 잡더니 다시 기어올라왔다. 다리와 다시 사이 깊은 골짜기로 인도하여 당도했을 때, 여자의 몸 안에서 뜨끈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월경이 시작된 것이다. 여자는 배멀미 같은 실망에 머리를 흔들흔들 저으면서 부엌에 가서 피를 씻어내고 천을 몇 겹 겹쳐 대었다. 서로를 안고 있으면 얘기할 수 있다, 안지 않고서 얘기하기는 쉽지 않다, 내일부터 닷새 동안,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더 이상 할 얘기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는 날개처럼 하늘하늘 춤추고 있을 뿐, 이제 곧 땅 위로 떨어질 테니. 그 여자하고는 매일 많은 얘기를 할까? 애들 얘기? 장사 얘기?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사람 집 장독대에 숨어 부부의 대화를 훔쳐 듣고 싶다.

여자는 죽은 사람처럼 배 위에다 손을 포개고 누웠다. 눈은 감았지만, 두 귀는 어둠을 향해 열려 있었다.

글 유미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