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영이/일본 저소비 對 한국 과소비

  • 입력 2002년 9월 4일 18시 34분


“한국이라면 폭동이 일어날 만큼 경제가 추락했는데 일본은 너무나 무감각하다.”

서울 주재 경험이 있는 한 일본인은 4일 도쿄(東京)증시 폭락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닛케이주가가 최고치의 4분의 1도 안 되는 9,075엔까지 떨어져 19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는데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일본 국민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상황에 대한 일본인의 체념은 외국인의 눈으로 봐도 심각하다. 10년 이상 장기불황에 지친 탓인지 “더 좋아질 것도 없지만 더 나빠질 것도 없지 않겠느냐”는 식이다.

물론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은 연일 비명이다. 다이와종합연구소에 따르면 8개 대형은행만 해도 최근 5개월 동안 주식하락에 따른 평가손이 4조엔을 넘는다. 주가하락이 계속되면 소비가 위축되고 기업은 또 인원감축에 나서 불황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각료들은 낙관론만 편다.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伯夫) 금융상은 “일본 경제의 기초는 튼튼하다”고 했고,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은 “주가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언젠가는 회복될 것”이라며 느긋한 태도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 일본 정부의 반복된 경제 실정(失政)과 낙관론이 국민을 지치고 체념하게 만들었다. 정책당국이 위기감없이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뒤늦게 공적자금을 쏟아붓는 식의 처방을 쓰다보니 부실채권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 더 이상 일본 정부의 경제개혁에 기대를 거는 일본인은 별로 없다.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갑만 움켜쥐고는 좀처럼 열려고 하지 않는다. 주가하락의 배경에는 이처럼 정책당국의 실기(失期)와 소비자들의 위축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일본과는 정반대로 요즘 한국은 과소비와 부동산 투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장래에 대한 특별한 보장도 없는데 모두들 ‘만성 투기꾼’이 돼가고 있는 것으로 바깥에서는 보인다. 정부가 뒤늦게 투기대책을 내놓았지만 정책 효과는 아직 미지수다. 일본의 ‘만성 저소비’와 한국의 ‘만성 과소비’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 것일까.

이영이 도쿄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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