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공적자금 TV정치쇼?

  • 입력 2002년 9월 8일 18시 02분


뉴기니 섬에 살고 있는 카파우쿠 족(族)에는 ‘토노위’라 불리는 지도자가 있다. 부자(富者)라는 뜻인 토노위는 마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봉사해야 한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이자를 받지 않고 빌려주어야 한다. 빚을 갚지 않아도 독촉하지 못한다.

대신 토노위는 정치 권력을 갖고 또 존경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빚을 지고 있으므로 토노위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부족사회에서도 정치지도자는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던진다.

3일부터 국회 공적자금 국정조사 특위가 가동되고 있다. 특위는 한 달여 동안 156조원의 공적자금이 쓰인 경위에 대해 조사한다. 특위 활동의 하이라이트는 10월 7∼9일 열리는 공적자금 TV청문회. 이 청문회가 진실 규명에 실패한 채 ‘정치 쇼’로 끝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먼저 조사대상을 보자. 국회는 감사원, 회계법인, 부실기업 등을 제외하기로 했다. 감사원은 지난해 3∼9월 공적자금 특감을 벌여 방대한 자료를 갖고 있다. 그런 감사원을 자료 제출기관으로만 선정했으니 정치권이 공적자금 의혹을 파헤치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부실기업의 분식회계 여부를 가리기 위해 회계법인도 당연히 조사해야 한다. 원인 제공자인 부실기업도 마찬가지다. 공적자금을 투입한 금융기관만 조사해서는 사태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청문회에 출석할 증인 선정에 대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맞서고 있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차남 김홍업씨, 처조카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증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당은 이들이 공적자금 비리에 연루됐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민주당은 이들의 증인채택을 반대한다.

공적자금이 어떤 돈인가. 환란(換亂)으로 만신창이가 된 부실금융기관의 빈 금고를 메우기 위해 전 국민이 대(代)를 이어 부담해야 할 혈세(血稅) 아닌가. 이 돈의 흐름을 제대로 밝히는 것은 역사적 소명(召命)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역 없이 누구든 증인으로 불러야 한다.

올 7월 검찰이 밝힌 공적자금 관련 중간수사 결과를 보면 보성그룹은 420억원으로 나라종금을 인수해 이 종금회사에 쌓인 3500억원을 꺼내 쓴 것으로 나타났다. 나라종금은 2조998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곳. 이 사례는 공적자금의 숱한 부실운용 사례 가운데 일부분일 수 있다. 아직 공적자금 운용에 대해서는 규명해야 할 부분이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로 조사대상과 증인을 축소하면 국민의 분노는 폭발할 것이다.

조사기간도 그렇다. 국정감사 기간이 겹친 데다 추석연휴, 부산 아시아경기대회까지 끼어 있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 정치권 내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졸속으로 끝내고 생색만 내는 야합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병풍(兵風)’을 희석시키기 위해, 민주당으로선 차기 정권보다는 현 정권에서 가볍게 매를 맞고 지나가려는 의도가 아닌지.

조사과정에서 한나라당은 한탕주의 폭로에, 민주당은 과거 정부의 실정(失政) 탓에 외환위기가 왔으며 이 때문에 공적자금을 조성했다면서 맞설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변죽만 울리고 화려한 수사(修辭)만 난무하면 의혹은 풀리지 않는다.

부족사회 체제보다도 훨씬 복잡한 현대 민주시민사회 체제에서 정치권에 몸담은 사람들은 고차원의 정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목에 힘 주고 다니라고 금배지를 붙여준 것이 아니다. 이들이 여전히 저차원의 정쟁(政爭)에 몰두한다면 뉴기니에 보내 뭘 좀 배우도록 해야겠다.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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