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현악6중주 1번 작품18은, 내가 너무 아플 때, 상처입은 동물이 양지바른 구석에 엎디어 상처를 핥듯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회억(回憶)하며 듣는 곡이다.
어줍잖게도 나는, 1년전 바둑계 최대의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한 유망한 신예기사에 대해 쓴 실명비판이 몇 달간 바둑계를 들쑤셔 놓았다. 어쩌랴. 글이란 본시 화살과 같은 것이어서 쓴 사람의 손끝을 떠나는 순간 이미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애초 의도야 어쨌든 내 글은 날아가 비수가 되었다. 그 유망기사도 아팠겠지만 그 못지 않게 나 역시 아팠다. 그때만큼 바둑글로 밥을 먹은 내 자신이 후회스러울 때가 없었다. 그 무렵 어느 날, 새벽 안개낀 양평 국도를 전조등 하나로 헤치다가 듣던 브람스의 현악6중주 1번은, 그래서 더 애절한 곡이 되었다.
결국 나는 15년간이나 몸담았던 직장을 떠났다. 어찌 아프지 않았을까. 대나무가 풍파를 겪으며 마디를 짓듯 내 삶에 한 매듭을 짓고 싶었다.
즐겨 거는 음반은 아마데우스 4중주단이 연주한 음반이다. 특히 2악장의 애절하고 우수에 찬 선율은 슬픔의 심연으로 가라앉히다 앉히다 종내엔 갖은 슬픔을 다 소진하게 하여, 그리하여 마침내 바닥에서 다시 부유(浮游)하게 한다.
27세의 청년 브람스가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연모하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현악에 실었다는 이 곡은 2악장이 영화 ‘인연’에 쓰여 더 유명해졌다. 2악장 테마만 따로 떼어 피아노 솔로로 변주한 곡도 현악 못지 않게 즐겨 듣는데, 피아노의 잔향에 아득아득 몸을 맡기다 보면 한 마리 회귀하는 연어가 된 나를 발견하곤 한다.
슈만이 그랬다던가.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된다고. 바둑을 일컬어 수담(手談)이라고 한다. 손으로 대화(게임)를 나누니 말이 필요치 않다. 말 많아 탈인 세상에 때론 말이 필요없는 것들에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담궈볼 가치가 있다. 명인(名人)에 오른 조치훈 9단이 그랬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고. 같은 어법으로 말하고 싶다. “그래봤자 인생! 그래도 인생!”…이 아니겠냐고.
가을이라야, 가을이어서 잘 어울리는 브람스의 이 대표적인 실내악곡을 이 가을 문턱에서 권하고 싶다. 이승살이가 못내 힘든 분들께.
정용진 타이젬이사·전 월간바둑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