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래 속에는 이 땅을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자리가 녹아있다. 한 켜 한 켜 나이테가 쌓이듯 입에서 입으로 불려지며 전해온 그 가락의 결 속에는 민족 정서의 원형질이 깃들어 있다. 그 행간을 들춰내 감춰진 무늬들을 드러내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다.
이 책은 고전 시가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즐겨 부른 소재인 어부가와 도연명, 무릉도원, 그리고 유방과 항우 등의 초한 고사 관련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꼼꼼히 읽고 그 의미를 곱씹어 본 묵직한 연구서다. 그는 노래에 담긴 사람살이의 자취와 정신적 지향을 당대의 역사 지평 위에서 해명하는 동시에 동아시아적 연관을 고려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설정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어부가 속에 그려진 어부 형상이 시대와 환경, 작가에 따라 어떤 전개를 보이며, 거기에 담긴 세계 인식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추적하는 데 집중된다. 어부래서 다 같은 어부가 아니다. 고기 낚는 어부(漁夫)가 있고, 세월 낚는 어부(漁父)가 있다. 언뜻 보아 거기서 거기인 작품들을 놓고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고, 관류하는 동질성을 포착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원을 향한 꿈, 강호로 내닫는 동경은 도시의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때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자동차가 없고 오염이 없었다고는 해도, 현실은 언제나 삶의 뿌리를 흔들고 위협한다. 그들은 생존이 위협당하고 실존을 질식시키는 현실 앞에서, 강호 자연 속 어부의 삶을 꿈꾸고, 무릉도원을 동경하고, 도연명을 선망했다. 이런 꿈과 동경의 뒤안에는 불온한 삶의 불안한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그 맥락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짚어내는 저자의 논리는 정치하고 섬세하다.
항우와 유방의 쟁패는 왜 그다지 많은 시조 속에 오르내렸을까? 영웅이 사라진 시대, 왜소해진 자아들의 대리 만족이었던 걸까? 느닷없이 옛 이야기에 열광하는 조선 후기 시인들의 내면을 그는 조분조분 짚어낸다. 우리 고전시가 연구가 어느새 이런 넓고 깊은 시야를 갖게 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책을 통독하고 난 나의 소감이다.
중간 중간 논리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잠수나 자맥질 따위의 물에서 부리는 재주를 뜻하는 수희(水戱)를 궁중연희와 동일시하여, 악장어부가를 민요 어부가에서 왔다고까지 논의를 진전시킨 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 ‘선유락(船遊樂)’과 선유놀음을 어부사의 이원적 전승 쪽으로 확대한 것도 과장의 느낌이 없지 않다. 이별(李鼈)의 ‘방언(放言)’시에 대한 해석은 생각이 다르다. 하지만 전체로 보아 작은 흠은 큰 장점을 가리지 못한다.
정민 한양대 교수·국문학 jung07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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