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눈]조광/죽은 이의 명예도 소중

  • 입력 2002년 9월 15일 19시 28분


역사는 특정한 공간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데 어울러 보려는 학문이다. 그러기에 지난날의 사건들이 오늘에도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앞날을 위해서도 이를 곱씹어보게 마련이다. 또한 역사는 사람들을 모든 생각의 중심에 놓고,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며 그 목숨과 삶의 의미를 따져보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서 오늘의 사람들은 자신이 나아갈 올바른 방향과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지난날과 진배없고, 사람들은 죽은 이의 명예까지도 산 사람과 마찬가지로 늘 중요시해 왔다.

조선왕조 후기의 역사만을 살펴보더라도, 자신의 신념이나 정치적 처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신원(伸寃)되어 명예를 회복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송시열은 1689년에 사약을 받았으나 1694년에는 신원되어 관작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01년에 진행되었던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윤행임이 사형을 당했으나 죽은 지 40여년이 지나서 신원되었다.

▼신념위해 목숨버린 사례많아▼

우리의 역사에서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렸던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서학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 신앙을 지키고자 했다. 그 순교자 중 일부는 19세기 말엽 조선정부로부터 신원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그 죽음의 가치는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사랑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 의해 재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동학을 창도했던 최제우도 1864년에 순교했다. 그의 정신적 후예들은 그를 신원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1871년에 ‘이필제의 난’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도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과 관계가 깊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던 사람들은 그 명예 회복을 통해 자신들의 삶과 믿음이 옳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처럼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은 죽어버린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과거지향적 행동이 아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야 할 올바른 방법을 결정하려는 노력의 일부다. 그리고 이는 보람찬 미래를 열기 위한 결의일 수밖에 없다.

1975년 한국현대사의 한 쪽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은 반대의견을 탄압하기 위해 고문과 사건조작을 일삼아 왔다. 우리가 살고 있던 대명천지 20세기 한국 땅에서 극도의 야만이 횡행했다. 그 야만은 우리 자신의 환상과 도피심리, 방관과 무관심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과 관련하여 254명이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그들 가운데 8명은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20시간만에 처형되었다. 그들의 사형은 사법살인이요 국가폭력의 전형적 예가 되었다. 그들이 사형을 당한 직후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 사건을 고문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판정은 너무나도 늦었다. 이미 사형 당한 8명의 귀중한 생명을 다시 살릴 수도 없고, 그 가족들이 당했던 고통의 양은 백두산보다 높게 쌓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과 고통은 우리에게 소중한 경험이요 자산이 된다. 그 죽음의 고통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되살리는 힘이 움틀 수 있고, 신체의 자유가 보장된 고문 없는 사회를 이루려는 꿈이 영글어 가기 때문이다.

▼의문사 진상규명 계속돼야▼

지난날 우리 선조들은 정치적 행동이나 신념 때문에 죽은 이들의 신원을 위해 노력했다. 이제 오늘 우리 앞에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죽고 고문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철저히 회복해 주고, 그 아픔을 보상해야 할 책임이 남아 있다. 이 책임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완수되어야 한다.

인혁당의 사형수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정신적 부채가 있다. 그들은 이를 늦게나마 기워 갚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깃들고 있는 이 땅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언제나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명을 다해버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우선 되살려야 한다.

그리하여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시한없는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 위원회는 아픈 과거의 정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려는 오늘 우리 결의의 상징이다.

조광 고려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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