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후기의 역사만을 살펴보더라도, 자신의 신념이나 정치적 처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신원(伸寃)되어 명예를 회복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송시열은 1689년에 사약을 받았으나 1694년에는 신원되어 관작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01년에 진행되었던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윤행임이 사형을 당했으나 죽은 지 40여년이 지나서 신원되었다.
▼신념위해 목숨버린 사례많아▼
우리의 역사에서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렸던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서학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 신앙을 지키고자 했다. 그 순교자 중 일부는 19세기 말엽 조선정부로부터 신원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그 죽음의 가치는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사랑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 의해 재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동학을 창도했던 최제우도 1864년에 순교했다. 그의 정신적 후예들은 그를 신원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1871년에 ‘이필제의 난’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도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과 관계가 깊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던 사람들은 그 명예 회복을 통해 자신들의 삶과 믿음이 옳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처럼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은 죽어버린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과거지향적 행동이 아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야 할 올바른 방법을 결정하려는 노력의 일부다. 그리고 이는 보람찬 미래를 열기 위한 결의일 수밖에 없다.
1975년 한국현대사의 한 쪽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은 반대의견을 탄압하기 위해 고문과 사건조작을 일삼아 왔다. 우리가 살고 있던 대명천지 20세기 한국 땅에서 극도의 야만이 횡행했다. 그 야만은 우리 자신의 환상과 도피심리, 방관과 무관심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과 관련하여 254명이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그들 가운데 8명은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20시간만에 처형되었다. 그들의 사형은 사법살인이요 국가폭력의 전형적 예가 되었다. 그들이 사형을 당한 직후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 사건을 고문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판정은 너무나도 늦었다. 이미 사형 당한 8명의 귀중한 생명을 다시 살릴 수도 없고, 그 가족들이 당했던 고통의 양은 백두산보다 높게 쌓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과 고통은 우리에게 소중한 경험이요 자산이 된다. 그 죽음의 고통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되살리는 힘이 움틀 수 있고, 신체의 자유가 보장된 고문 없는 사회를 이루려는 꿈이 영글어 가기 때문이다.
▼의문사 진상규명 계속돼야▼
지난날 우리 선조들은 정치적 행동이나 신념 때문에 죽은 이들의 신원을 위해 노력했다. 이제 오늘 우리 앞에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죽고 고문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철저히 회복해 주고, 그 아픔을 보상해야 할 책임이 남아 있다. 이 책임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완수되어야 한다.
인혁당의 사형수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정신적 부채가 있다. 그들은 이를 늦게나마 기워 갚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깃들고 있는 이 땅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언제나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명을 다해버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우선 되살려야 한다.
그리하여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시한없는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 위원회는 아픈 과거의 정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려는 오늘 우리 결의의 상징이다.
조광 고려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