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가 메시지라면 사람한테는 옷이 메시지를 드러내는 미디어라 할 수 있다. 의상만큼 그 사람의 안팎과 사회 변화, 시대 흐름까지 표현해주는 기호도 흔치 않다. 현대의 남성에게 있어 정장 양복은 직장의 유니폼이자 전투복이다. 첫 출근날, 목을 곧추세우고 힘주어 넥타이를 조여 매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목은 영혼과 몸의 커뮤니케이션을 상징하는 부위이며 넥타이는 그 목을 무엇에다 붙들어매는 장치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조인다는 건 자신을 사회에 정식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출사표이자, 능률과 실력으로 평가받기 위해 자기 절제를 감수하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닷컴 붐과 더불어 자유와 창의력이 주목받던 2000년 전후, 직장인들은 편안한 티셔츠와 카키색 바지로 갈아입었다. 다우존스지수가 10,000을 오르내릴 때는 기업 임원과 은행가들까지 골프복 차림으로 출근하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캐주얼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팍팍한 세상은 딱딱한 정장을 요구하는 법이다. 자칫 헐렁하게 보였다가 상사와 고객의 신뢰를 잃고 일터까지 뺏기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닷컴 거품이 빠져나가고 미국경제가 추락하면서, 더구나 9·11테러 참사 이후 보수와 강경 분위기가 사회를 휩쓸면서 월스트리트는 다시 화이트칼라의 군복, 즉 정장 양복을 차려 입은 넥타이부대가 점령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선 드레스 코드의 부활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닷컴 열풍과 함께 기업마다 권장하던 캐주얼 복장이 유효한 모양이다. 우리 경제와 세상살이도 아직까지 괜찮다는 뜻일까. 자유복 때문에 의식과 행동이 지나치게 풀어진다는 지적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격식 파괴와 창의적 사고 존중 분위기에 최근엔 주5일 근무제 확산까지 겹쳐 당분간 캐주얼 복장이 우세하리라고 삼성패션연구소는 내다본다. 남자의 정장 양복이 미국처럼 무서운 의미를 지닌다면, 우리나라 남자들은 제발 자유롭게 옷 입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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