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연루 가족도 고문▼
명동성당에서 열린 ‘인혁 가족’을 위한 기도회 다음날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이 목요기도회는 시종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이른바 ‘인혁당’사건에 연루된 김모씨의 부인이 다른 가족들과 함께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다닌다 하여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성고문을 당한 과정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성고문 피해자의 남편을 포함한 8명의 ‘인혁당’ 관련 피고인들은 3개월 만인 4월 9일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은 지 20시간 만에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구치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달려간 유가족들은 이 날 오전 교수형에 처해진 사형수들의 시신을 수습해 버스에 싣고 당시 함세웅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던 서울 응암동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르려 했으나 경찰이 이 운구차를 강제로 견인해 벽제화장장에서 시신을 화장해버렸다.
그로부터 어언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 ‘인혁당’사건이 바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되었음이 국가기관에 의해 확인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근 “1974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해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국가를 건설하려했다는 혐의로 23명이 구속되고, 김용원씨 등 8명이 사형된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유신정권은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위해 검찰은 물론이고 인권의 최후 보루인 대법원마저 동원했다. 독재정권의 법을 동원한 이 같은 폭력에 대해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규정했었다. 아무리 초헌법적 대통령 긴급조치가 공포된 상황이라 하지만 대법원이 ‘사법살인’에 끝내 협력해 역사적 오판을 한 1975년 4월 8일 이미 사법부의 조종(弔鐘)이 울렸던 것이다.
인혁당 사건의 상고심 판결은 두 차례나 담당 재판부가 바뀐 끝에 이례적으로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13명의 대법원 판사들로 구성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같은 사실은 대법원 판사들이 그들의 양심에 따라 재판하지 않고 권력에 굴종해 개연성이 높은 ‘사법살인’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쪽으로 타협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대법원장을 제외한 12명의 판사들은 각자 2명씩 연구원 판사(총 24명)를 두고 있었다. 이 판사들 가운데는 대표적 ‘어용 판사’들도 있었지만 소수 이견을 많이 남긴 ‘대쪽판사’도 있었고, 일생을 청빈하게 살다간 ‘도시락판사’도 있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사법살인’의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인혁당 사건 이외에도 진보당 사건과 민국일보 사건 등도 있다. 하지만 국가기관이 ‘사법살인’으로 공인함으로써 논란의 여지조차 없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법부가 지금껏 침묵하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법부, 직접 조사 나서야▼
왜 그 당시 인혁당 사건 담당 상고심 재판부가 두 차례나 바뀌었고, 왜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게 되었는지, 어느 판사가 적극 협력했는지, 이 ‘핑퐁재판’ 과정에 권력의 입김이 어떤 경로로 개입했는지, 그 주체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사실대로 조사하고 밝혀야 한다. 당시 대법원 판사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떴지만 아직 생존한 분들이 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당시 대법원 연구원판사들도 중진 혹은 원로 법조인이 되어 대부분 생존해 있지 않은가.
사법부는 억울하게 숨져간 원혼들을 달래고 그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뒤늦게나마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권력에 협력해온 대법원의 오류에 대해 국민에게 고해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법부의 존엄을 되찾는 길이 아니겠는가.
김진홍 한국외국어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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