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守 節(수절)

  • 입력 2002년 9월 22일 18시 00분


守 節(수절)

嫁-시집갈 가凌-업신여길 릉 辱-더럽힐 욕

牌-호패 패寡-과부 과 倡-인도할 창

‘守節’은(貞節을 지킴)은 여성에게 强要(강요)되었던 족쇄였다. 그래서 남편이 죽어도 改嫁(개가)하지 않았고 凌辱(능욕)당했을 때는 죽음으로 抗拒(항거)했다. 혹 男便을 따라 함께 죽으면 ‘烈’(열)이라고 하여 더 더욱 表揚(표양)의 대상으로 삼았다.

옛날 중국에서는 남자의 ‘不事二君’(불사이군)과 함께 여성의 ‘不更二夫’(불갱이부·아내가 두 남편을 모시지 않음)가 강조되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이른바 ‘石牌坊’(석패방)이다. 돌에다 烈女나 節婦(절부)의 貞節을 기린 것으로 우리의 烈女碑나 烈女門과도 같다.

石牌坊을 세운 것은 묘하게도 秦始皇(진시황)이 그 시초다. 중원을 통일한 뒤 문란했던 성도덕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다. 그 뒤 漢의 대학자 劉向(유향)은 列女傳을 썼으며 貞節을 지킨 여자에게는 天子가 비단과 곡식을 하사하고 石牌坊을 세워주기도 했다.

그러나 唐나라 때에는 再嫁, 심지어는 三嫁를 했던 公主가 무려 20여 명에 이르렀을 정도였으며, 宋의 재상 范仲淹(범중엄)은 改嫁한 어머니와 함께 義父 朱氏 집에서 살았고 後에 寡婦(과부)가 된 며느리를 직접 改嫁시키기도 했다. 王安石도 병든 자식이 아내와 불화가 잦자 친히 며느리의 改嫁를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南宋에 와서 朱子學이 극성하면서 改嫁가 죄악시되었으며 改嫁하면 죽어 지옥에 떨어져 두 男子가 톱으로 반쪽 낸다는 말까지 성행했다. 그 뒤 明나라에 오면 조정의 창도로 貞節觀念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正史의 기록을 볼 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남녀관계는 자유분방하기까지 했으며 守節이 미덕시되거나 再嫁가 죄악시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推定된다.

그러던 것이 조선건국 이후 朱子學의 예속에 물들면서 守節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의 여성에 관한 모든 문헌은 위로는 實錄에서 아래로는 郡邑誌(군읍지)에 이르기까지 女性의 貞操를 둘러싼 淫行(음행)과 守節에 국한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太祖와 太宗의 권장에 이어 成宗代에 오면 아예 법령으로 改嫁를 금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 따른 사회적 문제점도 많았다. 茶山(다산)은 牧民心書(목민심서)에서 烈女의 表揚(표양)을 신중히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燕巖(연암) 朴趾源(박지원)같은 이는 烈女咸陽朴氏傳을 써서 소위 ‘烈女’들의 허구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朱子學의 극단적인 名分論에서 비롯된 폐단이라 하겠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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