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절망의 소산

  • 입력 2002년 10월 2일 18시 25분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 죽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었다.” 한(漢)나라 때 사관이었던 사마천은 궁형(宮刑)을 당한 뒤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바른말을 하다 당한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굴욕 속에서도 구차한 삶을 이어간 것은 가슴속에 품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뜻을 펼친 결과물이 오늘날 최고의 역사고전 중 하나로 꼽히는 ‘사기’다. 사마천의 이 책은 남자로서 진정 견디기 힘든 최악의 고통을 가장 가치 있는 창조물로 승화시킨 ‘절망의 소산’이었다.

▷성공한 리더나 뭔가 의미 있는 작업을 이뤄낸 사람들은 절망적 위기 상황을 거꾸로 단련의 기회로 삼아 극복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여름 세상을 떠난 고 이주일씨도 그 중의 하나였다. “뭔가 보여드리겠다”는 우스갯말은 정말이지 뭔가 보여주고 싶은데 보여줄 방법이 없었던, 그 길고도 배고픈 무명시절이 없었다면 나오지도 못했을 유행어였다. 살다보면 더 이상 내려가려야 내려갈 수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그냥 확 죽어버리는 대신 돌아서서 죽을 힘을 다해 뛸 때, 절망은 어느덧 사라진 것을 종종 깨닫게 된다. 이름하여 절망의 역설적 힘이다.

▷보통 사람에겐 이게 쉽지 않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던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그저 파괴적 힘으로 작용할 뿐이다. 대통령의 아들 김홍걸씨는 법정에서 “원래 낙천적이었으나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게 되면서 절망과 무력감을 느끼게 됐고 성격도 변했다”고 고백했었다. 대통령의 일생에 가장 큰 불행을 안겨준 홍걸씨의 투옥도 결국 절망의 산물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온몸이 석회처럼 굳어가는 병으로 죽어가면서 쓴 박진식씨의 책 제목처럼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절대절망으로 피할 길 없는 그런 불행은 사실 드물다. 아직 벗어날 길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지레 절망을 해버린다. 희망에 속기보다 절망에 속는 사람이 훨씬 많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북한의 신의주 특별행정구 계획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절망감에서 비롯된 절망의 소산이라고 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극도의 절망 분노 등 위기상황에서 맹렬하게 분비되는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르몬이 김 위원장에게도 솟아난 것일까. 고양이가 적을 만났을 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는 것, 막다른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것도 이 호르몬의 영향이다. 김 위원장의 절망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되 희망의 또 다른 모습이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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