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비극’은 한 둘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진작 프랑스로 유학 갔던 화가 사에키(佐伯祐三·1898∼1928)는 밤낮 없이 그리다가 미쳐 죽어 ‘일본의 고흐’라 불리고, 우리의 이중섭(1916∼1956)은 6.25동란의 후유증으로 굶어죽어 ‘한국의 고흐’로 불리곤 한다. 모두 일생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어도 남긴 일은 마침내 문화사의 자부심으로 자리잡은 점이 서로 닮았다.
개인적 불행을 딛고 세워진 문화성취의 방식이 이 대명천지에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을 법 싶지만, 천만의 말씀. 운명의 장난 같은 가혹한 드라마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예술 쪽의 창조적 발상은 기왕의 관행에서 벗어난, 말하자면 대소간에 ‘미친 생각’이 그 발단이기 때문이다.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색깔을 배열해 시를 지을 수 있다”는 믿음의 작업인데도, “사람들은 화가가 자신들과 다른 눈으로 보면 미쳤다고 말하네” 하고 고흐는 안타까워했다.
고흐 같은 화가가 한 때의 미친 생각을 품어서 키운 고독의 산물이 위대한 미술인데도 성공한 미술의 아름다움에만 눈길을 보내는 식으로 세상은 건성이다. 해마다 수천 명의 미대 졸업생이 쏟아지고 있음도 우리 사회가 미술을 ‘되는 장사’라고만 보는 맹목 탓이 아닐까. 부유한 주식중개인이자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던 폴 고갱이 전업작가가 되려고 집을 뛰쳐나가기 전 만해도 그의 일요화가 취미를 고상한 고급취미라며 아내가 좋아했다 한다.
보진 못했지만 화란의 고흐미술관에서 지난 6월초에 막을 내린 ‘고흐 대 고갱’이란 기획전 취지는 금방 짐작이 간다. 후기인상파인 둘은 근대미술의 태동을 알린 전령사였다. 고흐가 해바라기를 즐겨 그린 것은 이 꽃이 믿음과 사랑의 상징으로 본 때문이었다. 이처럼 근대미술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마음 그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자르는 세기의 사건으로 두 달만에 파국이 된 둘의 공동작업 전말이 아직 미궁인 채로 남아있음도 기획전의 가치를 더했을 것이다. 콜린스(‘반 고흐 vs 폴 고갱’·이은희 역)가 이전 유서와는 달리 미술사 및 정신분석학의 두 시각을 동원해서 둘 관계를 집중탐구 했다고 자랑함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대목이 아직 많다는 반증이다.
두 미술천재의 비극적 인생행로는 진작 신화가 되고도 남았다. 거기엔 직·간접의 문학도 크게 작용했다. 동생 테오에게 매일처럼 보낸 고흐의 편지, 그림에서 원시성을 찾는 도정을 자술한 고갱의 ‘노아노아’는 직접문학에 든다.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처럼, ‘신비스러운 이야기’ 신화가 소설 등으로 옮겨지면 간접문학이 된다.
영국 소설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박진아 역)는 고갱의 일대(一代)를 소재로 삼은 고전이다. 주인공의 성격을 치밀하게 묘사한 몸의 문학은, 문학수업이 몇 차례 ‘달과 6펜스’의 필사(筆寫)였다는 우리 현역 소설가 한 분의 자랑처럼, 고갱 미술에 맞먹는 높은 경지다. “창조할 인물에 피와 살을 부여하는 것은, 말하자면 다르게는 전혀 표현할 길이 없는 그 자신의 내부의 어떤 것에 대해서 생명을 주고 있는 것과도 같다”는 대목처럼 소설은 몸이 고갱을 빌어 펼치는 예술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재미도 재미지만 ‘달과 6펜스’는 예술 애호가들이 경청할만한 메시지로 가득하다. “아름다움이란 세상에서도 귀한 거야.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지나가다가도 함부로 주울 수 있듯 그렇게 흔해 빠진 건 아니란 말이야. 아름다움이란 멋지고 불가사의한 것이야. 예술가가 제 영혼의 고뇌를 거쳐 이 세상의 혼돈 속에서 만들어 내는 거란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미가 창조되었다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이런 구절은 예술의 실체에 대한 소회이겠고, “천재,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경탄할 만한 존재야. 하지만 그걸 가진 자한테는 무거운 짐이지,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굴지 않으면 안 돼요”는 참 예술가에 대한 따뜻한 대접의 당부일 터다.
올 가을에도 전시장을 찾는 발길이 줄을 이을 것이다. 전시장 찾기 전후에 미술이 문학으로 다시 태어난 경우를 챙겨보면 어떨까. 예술을 즐기는 기쁨이 배가될 것임은 더 길게 말할 거리가 못된다.
김형국 서울대 교수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