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정경유착의 비참한 종말

  • 입력 2002년 10월 6일 18시 16분


그리스 신화에는 ‘이카로스의 추락’이 나온다. 크레타왕 미노스의 미궁(迷宮)을 만든 명장(名匠)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의 비극적 죽음을 다룬 이야기다. 이 테마를 소재로 한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브뢰겔의 그림도 유명하다.

미노스가 크레타 섬을 못 벗어나게 하자 다이달로스는 아들과 함께 새의 깃털을 모아 큰 날개를 만든 뒤 밀랍(蜜蠟)으로 몸에 붙이고 탈출을 시도한다.

다이달로스는 말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날개가 바닷물에 잠기지 않도록 너무 낮게 날지 말아라. 또 너무 높이 날아서도 안 된다. 태양의 열기에 깃이 타버리고 그러면 추락할 것이다.”

이카로스는 처음에는 조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감이 넘쳐 아버지의 경고를 잊고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 결국 밀랍이 태양열에 녹으면서 바다에 떨어져 숨진다.

대북(對北)송금 의혹으로 다시 논란이 된 현대그룹을 보면서 이카로스의 죽음을 떠올린다. 한때 한국을 대표했던 기업이 이글거리는 태양(권력)에 너무 가까웠다가 처참하게 몰락한 모습을 본다.

언젠가 전모가 드러나겠지만 산업은행이 2000년 6월 현대상선에 빌려준 4900억원(당시 4억달러)이 북한 송금용 ‘뒷돈’이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엄낙용(嚴洛鎔) 전 산은 총재의 국정감사 증언은 대출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케 하지만 최종판단은 보류토록 하자.

다만 최소한 금융관행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대출이 결코 정상적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이 과정에 정권의 실세(實勢)들이 개입했다는 것도 확실해 보인다. 정부가 국책은행을 통해 5000억원 가까운 거액을 쉬쉬하면서 온갖 무리를 해 특정기업에 대주어야만 할 말못할 속사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김대중(金大中) 정부 출범후 현대가 벌인 금강산사업은 애당초 경제적 채산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대는 98년 금강산사업의 대가로 6년간 9억4200만달러를 북한에 주기로 합의했다. 우리 돈으로 1조원 이상이다. 당시 도쿄특파원이었던 필자는 일본의 경제전문가들이 “사업성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젓던 모습을 기억한다.

이 수지 안 맞는 사업의 배경으로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 창업주의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를 꼽는 시각도 있다. 그런 측면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과연 감상만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었을까.

현대가 현 정부로부터 반대급부를 약속받고 대북지원의 ‘총대’를 멨다는 분석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정황이나 지금까지 정부가 현대를 돕기 위해 보여준 ‘각별한 관심’을 종합할 때 개연성이 높은 구도다.

현대의 금강산사업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기업이 본연의 사업을 내팽개치고 정권과의 ‘물밑 거래’를 통해 채산성 없는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곪아간 것까지 정당화할 논리로는 약하다. 더구나 거래의 투명성이나 국민적 공감이 없었고 그 과정에서 커진 기업 부실을 메우기 위해 막대한 세금까지 들어간 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해 9월 이렇게 분석했다. “김 대통령의 북한진출 요구에 응한 기업들은 후회하고 있다. 대우의 붕괴와 현대의 해체에도 대북사업의 혼란과 실패가 영향을 미쳤다.”

만신창이가 된 현대의 현주소는 기업이 권력과 일정거리를 두지 않고 도를 넘는 ‘유착’에 빠질 때 어떤 종말을 맞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한국기업들이 ‘실패의 연구’를 통해 무언가 배우고자 할 때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이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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