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김대통령 왜 말이 없나

  • 입력 2002년 10월 9일 18시 19분


김대중 정권의 의혹사건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지난주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와 한철용 육군소장의 충격적인 국회증언은 현정권 국정운영이 의혹과 함께 위기상황에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상선 4000억원 지원은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 지시’ ‘북한의 서해도발 가능성보고 묵살은 김동신 국방부장관’이라니 대명천지에 있을 법한 일인가. 거론된 당사자들은 펄쩍 뛰며 부인하고 자체조사도 한다하니 얼마나 사실이 밝혀질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재경부 차관을 지낸 전 산업은행 총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현역 소장의 증언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한마디로 ‘이런 수준이니…’다. 당사자들의 ‘사실무근’이란 말만으로는 지금의 분위기를 뒤집기 어렵다. 그런데 더 괴이한 것은 상황이 대단히 심각한데도 대통령은 계속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난조 뿌리는 ´햇볕´▼

금융질서를 흔들어 경제력을 떨어뜨리고, 군의 경계력을 흩뜨려 전투력을 깎아 내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지목된 사람은 정부의 핵심인사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겠는가. 이유가 있다. 증언이 터진 분야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한가지 뿌리에서 연유한 것이다. 바로 DJ정권의 햇볕정책이다. 퍼주기 소리를 얼마나 더 듣건 간에 햇볕정책을 어떻게든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현대측에 정부지원이 불가피했을 것이고, 살얼음 위를 걷더라도 북한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조금 물러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 아닌가. ‘햇볕’에 가위가 눌리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요, 퍼주기에다 눈치보기까지 엉키면서 만들어진 합작품이다. 햇볕정책의 그늘 속에 되레 우리가 속으로 얼마나 골병들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무턱대고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국기(國基)까지 흔들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라고 둘러대기엔 우리의 손실이 너무나 크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태까지 이르게 된 저변엔 현정권의 무능이 한몫 했다. 국정 각 분야에서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는 햇볕정책을 추진한다면서 국민적 공감형성을 위한 공론과정을 제대로 거친 적이 있는가. 일단 저질러 놓고 밀어붙이려 했던 것 아닌가. 그러니 자연 밀실에서 추진했고 그만큼 정책의 투명성도 없어진 것이다. 이 정권처럼 민심과 동떨어져 피해 다닌 정권도 없다. 한마디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인가. 햇볕정책 여파로 민심이 이토록 뒤숭숭한데도 총감독격인 김대중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다. 국정에 대한 어떤 궁금증도 풀어주겠다며 ‘대통령과의 대화’ TV프로그램에까지 나가 시시콜콜한 질문에도 대답하던 김 대통령이 아니었나. 햇볕정책의 과실로 노벨상을 탔다면 후유증의 책임도 똑같이 져야 한다. 정치의 타이밍을 누구보다 잘 아는 대통령인데 지금 시기를 놓치면 후일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의 여진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김 대통령이 나서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어느 정권이든 버팀목(Institution)이 있는 법이다. 지역적으로 때론 영남이, 때론 호남이 정권의 한 가닥 근간을 이뤄왔지만, 공통적인 버팀목은 바로 관료, 군, 검찰조직이다.

▼핵심조직 흔드는 위기▼

그런데 현 정권은 이 핵심조직을 몽땅 흔들었다. 현대 지원의혹을 놓고 드러난 전임 대통령비서실장과 산은총재간의 갈등은 관료조직 상층부의 난기류를 드러낸 것이고 그 여파는 순식간에 조직의 밑과 옆으로 퍼져 국정난조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서해도발 보고서를 둘러 싼 군내부 의견도 엇갈려 명령에 죽고 산다는 군의 모습이 어지럽다. 검찰도 예외가 아니다. 검찰총수의 도중하차를 비롯해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이 정권에서처럼 논란거리가 된 적도 없었다. 국정난조가 이처럼 심각한 상황인데도 왜 대통령은 말이 없는가. 임기말 국정에만 전념하겠다는 것은 그냥 해본 말인가. 이보다 더 중요한 국정이 어디 있는가. 전념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은 위기상황이다. 대통령의 최대정책이 심각한 후유증에 휘말려 있으며 더불어 나라의 근간도 흔들리고 있다. 이로 인해 앞으로 엄습할 먹구름을 생각하면 위기감은 더욱 고조된다. 피해 간다고 해서 영원히 묻힐 일들인가. 이제는 ‘시간이 약’이 아니다. 김 대통령은 답해야 한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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