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허준영 사장 ˝내 경영 노하우는 레슬링˝

  • 입력 2002년 10월 10일 16시 07분


허준영 대표는 레슬링 매트 위에서 상대를 찍어 누르고 또 눌리며 경영기법을 배웠다. 레슬링이든 사업이든 결정적인 때가 무르익기까지는 달래고 어르고 오래 참아야하지만 그 ‘때’가 오면 놓치지말고 온 힘으로 ‘기술’을 걸어 한 순간에 승부를 내야 한다.-전영한기자-
허준영 대표는 레슬링 매트 위에서 상대를 찍어 누르고 또 눌리며 경영기법을 배웠다. 레슬링이든 사업이든 결정적인 때가 무르익기까지는 달래고 어르고 오래 참아야하지만 그 ‘때’가 오면 놓치지말고 온 힘으로 ‘기술’을 걸어 한 순간에 승부를 내야 한다.-전영한기자-
부산 아시아경기대회를 색다른 감회 속에 지켜보고 있는 최고경영자(CEO가) 있다.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로 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직전 부상해 출전이 좌절됐던 허준영씨(33).

그는 이제 한국마이팜제약의 대표이사로 연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레슬링 국가대표에서 물러난 뒤 땀으로 오늘의 중견기업을 일궈낸 허 사장은 그래도 레슬링에 집착이 큰 지 아시아경기대회 이야기부터 꺼냈다.

“매트에서 기진맥진하는 선수들이 부러울 때가 있어요. 사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그저 ‘밀리면 안된다’는 순진한 다짐만을 하거든요. ‘잔머리’를 쓰지 않아도 그러다 보면 결국 이기게 되니까.”

올림픽 등 레슬링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면 그는 가벼운 흥분에 휩싸인다. 체중조절 문제로 고생했던 시절, 격한 운동과 부상의 악몽이 떠올라 한동안 매트가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귀소본능’ 비슷한 것이 남아 있다. 매트에 뭉그러진 그의 왼쪽 귀도 이젠 예전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다.

“‘레슬링 정신’을 무슨 ‘막무가내 정신’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계속 달래고 어르면서 틈을 보는거죠. 그러다가 기술을 들어갈 때는 한 번에 단호하게 끝내버리는 겁니다.”

허 사장은 현재 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에 시가 10억대의 110평짜리 빌라에 부인과 두 자녀와 함께 살면서 2억원을 주고 산 고급승용차 ‘BMW 750’을 몰고 다닌다. 그러나 그는 “흠이 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른 청년재벌들처럼 벤처투자를 해서 돈 번 것도 아니고, 크게 주식을 해서 한몫을 챙긴 것도 아닙니다. 회사를 인수 합병하며 약간의 가욋돈이 남았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월급을 저축하고 굴려서 ‘땀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번 만큼 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그는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16∼18시간이라고 했다.

허씨는 전남체고 재학시절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56㎏ 이하급 국가대표로 뽑혔다.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무릎인대가 끊어져 은퇴하기 전까지, 그는 태릉선수촌에서 매일 8시간씩 운동에 전념했다.

“레슬링이 몸으로 하는 운동이잖아요. 몸으로 서로를 부대끼다 보면 우선 ‘밀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점수를 따고 승부가 나면 이기든 지든 서로를 껴안을 때가 많죠. 5분이란 짧은 시간에 ‘정’이 들게 되는 겁니다.”

허 사장은 ‘레슬링 노하우’를 영업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단국대 수학교육과와 산업노사대학원을 졸업한 뒤 1994년 근화제약 영업사원으로 들어간 그는 입사 3개월 만에 전체 영업사원 150명 중 1위를 차지했다. 다른 직원에 비해 10배 이상의 매출을 올려 연간 개인매출 15억원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인센티브제’가 활성화 되기 시작해 허 사장은 98년 제약회사를 퇴사하기 전까지 6년 동안 회사의 연간 판매왕을 석권했고, 한 해 평균 1억2000여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몸과 몸이 만나는 밀착 비즈니스’가 그의 철학이었다. 몸이 앞서가면 서로의 마음이 따라가게 돼 있다는 다짐이었다. 의사 부인들을 만나 같이 장을 보고 휴일에 이사를 가는 의사들을 만나서는 이삿짐을 챙겨주었다. 새벽에 교통사고가 난 의사 부인들을 만나서는 보험처리까지 다 자신이 해 주었다고 한다.

“탐색전을 할 때는 탐색만 해야지, 섣불리 ‘기술’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죠.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이상씩 ‘사전 정지작업’을 하고 보니 약 안 사주겠다는 의사들이 없었습니다.”

조직관리에서는 ‘공동체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해 한 때 몇몇 직원들이 회사를 떠난 적도 있었다. 제약회사 퇴사 후 약국체인점을 연 그는 지난해 말 한국마이팜제약을 인수한 뒤 얼마간 현금유동성이 나빠져 자금문제를 겪었었다.

“명문대 출신 중 동요하는 사원들이 많더라고요. 팀을 이뤘으면 끝까지 팀으로 승부를 해야지, 초반전에 밀린다고 처음부터 기권하는 것은 나약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저는 회사를 운명공동체로 인식하는 사람들만 남아달라고 했고 그 분들은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회사가 안정된 뒤 허 사장은 사원 부인들 생일에 꽃다발을 보내 ‘우리는 한 가족’임을 확인하곤 한다.

요즘은 ‘태반 붐’이 일고 있어 허 사장은 태반으로 만든 영양제 ‘이라쎈’을 홍보하며 종합병원 의사들을 만나고 다닌다. BMW승용차는 구입한 지 2년이 조금 안 됐지만 벌써 계기판의 주행거리는 9만8000㎞가 넘었다.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 하지만 데이터베이스에 1만명의 주소록이 담겨 있다고 했다. 대표이사지만 아직은 세일즈가 익숙한 체질이라 ‘플레잉 코치’로 뛴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신의 가정관리에 대해 묻자 허 사장은 웃으면서 이렇게 둘러 말했다.

“‘폴 승’도 자주 거둘 수 있고…, 레슬링은 사실 부부금실에 더 없이 좋은 스포츠입니다.”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가르쳤던 후배 강경일 金메달 목에 걸어 흐뭇”▼

훌륭한 선수는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올림픽에 관한한 허준영 사장은 번번이 때를 놓친 선수였다.

90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허 사장은 무릎부상을 입었다. 출전포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또 무릎부상을 입었다. 이때 완전히 선수생활을 접었다. 국내 대회에서는 자신이 매트에 눕혔던 동료들이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는 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가슴앓이를 했다.

역설적이게도 선수가 아닌 관객으로서 올림픽을 지켜보며 허 사장은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

4일 열린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그레코로만형 60㎏급 결승. 제약회사 세일즈맨이 되기 전 천안상고 레슬링 코치를 하며 기초부터 가르쳤던 후배 강경일(26·삼성생명)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레슬링 경기시간은 짧지만 인생의 승부 겨루기는 단시간에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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