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냐고 물었다. 김 사장은 가본 적이 있는 카페 뒷마당에 ‘월암동(月巖洞)’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관련될 것이라고 하였다.
퍼뜩 내 머리 속을 스치는 사람은 오히려 150년 전 문인 남종현(南鍾鉉)이었다. 그는 호가 월암이요 문집의 이름이 ‘월암집’이었다.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그 월암이라면 분명 남종현과 관련될 것입니다. 서대문 밖 성곽 아래 큰 바위가 있고, 거기에 ‘월암동’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 사장은 당장 가보자고 했다.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기상청 옆에 있는 한 카페를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유리창 너머 뒷마당에 우람한 바위가 놓여 있고 ‘월암동’ 세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보는 순간 “저거다!”란 말이 튀어 나왔다. 저것이 바로 남종현이 말한 글씨요, 이 카페에서 스위스 대사관이 있는 일대가 그의 옛집이 있던 곳이 분명하였다. 그의 글을 읽으며 늘 월암동이 어딜까 궁금했었지만 우연스럽게 한밤중에 취한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이야! 묘한 흥분과 감회가 일었다.
우리가 그것을 두고 떠드니 주인 아주머니도 신기한 듯 귀를 기울였다. 바위 위로 올라가자 서대문 일대가 어둠 속에서도 눈 아래 훤하게 보였다. 당시에는 왼쪽으로 경기감영, 앞으로는 둥그재, 오른편으로는 서지(西池)가 있었다. 서지는 연꽃으로 유명하였고, 그 옆에는 천연정(天然亭)이란 멋진 정자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옛날 풍경이 오버랩되었다. 이 동네의 이름이 송월동이란다. 월암과 관련이 있는 것일게다.
월암 남종현은 이 바위 아래 4대째를 빈한하게 살았다. 그는 벼슬을 하지 못한 채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훈장생활을 하였다. 당시 이 바위 아래에는 수십 호의 빈가가 모여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서대문 밖 서민의 애환 섞인 삶을 엿볼 수가 있다. 친구래야 ‘송남잡지(松南雜識)’라는 명저를 남긴 조재삼(趙在三) 정도가 있었다. 월암이란 호를 쓰게 된 내력은 ‘월암서(月巖序)’란 그의 글에 나온다.
“도성의 서쪽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한다. 돈의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성곽을 따라 돌아가면 왼편 1리쯤 되는 곳에 성곽을 등지고 불쑥 솟은 둥글고 검은 바위가 있는데 월암(月巖)이라고 부른다. (…) 어떤 호사가(好事家)가 바위에 ‘월암동(月巖洞)’ 세 글자를 크게 새기고 붉은 주사를 채워 넣었다. 의령(宜寧) 남종현(南鍾鉉)의 집이 그 바위 아래에 있어 호를 월암이라고 한다.”
호를 사용하지 말자는 지론을 가졌던 그를 월암 아래에 산다고 모두가 월암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곧 월암이란 호를 버리겠다고 선언하고 ‘거호서(去號序)’를 썼다. 이름조차 동네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제에 호가 있은들 알아줄 자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월암동’ 바위 아래를 차지하면서도 주인행세를 포기한 가난하고 자의식 강한 문인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카페의 뒷마당에 갇혀 있고 주변에는 옛 모습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채 망연히 놓여있지만, ‘월암동’ 석각(石刻)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표지다. 한밤 우연히 찾아간 옛 성곽 아래를 떠나며 온갖 상념이 떠오름을 어쩌지 못한다.
안대회 영남대교수·한문교육과 ahnhoi@yumail.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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