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음악과의 인연은 출가사문이 되어서도 잠재의식 속에서 꿈틀거렸다. 행자시절 낮으막한 능선 너머에 있는 아주 작은 나한(羅漢)굴은 어른 스님의 눈을 피해 부르고 싶던 노래를 실컷 부르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시원하게 노래를 몇 곡 열창하고 난 다음에야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곤 했다. 수계를 하고 강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불경 외에 다른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몰래 포행(산책)길에서 함께 했던 음악은 고단함을 쉬게 하는 좋은 도반이 되어 주곤했다.
그 시절 마음이 힘들 때 위로를 삼았던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D단조 op. 30번이었다. 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탄토, 잔잔하게 시작하는 오케스트라의 서주부에 이어서 피아노의 명징하고 진지한 멜로디가 뒤따른다. 힘차고 다이내믹한 선율로 이어지면 마치 단단하고 넉넉한 대지의 숨결을 느끼며 고단함을 쉬어 가는 수행자만의 풍요 속으로 젖어들곤 했다.
수행길에도 윤활유 역할을 하는 변화가 필요하듯 후반부 밝고 힘찬 변주는 너무 규칙적인 생활이라 타성에 젖어버릴 수 있는 시간들을 다잡게 했다.
또 때론 2악장 아다지오 전반부에 나타나는 오보에의 독주처럼 망망한 우주에 혼자만이 존재하는 느낌, 그 근원적인 고독에 철저하게 빠져있을 때도 있었다. 피아노의 힘찬 화음과 화려한 음의 움직임은 유쾌하게 2악장을 마무리하는데 마치 독경이나 기도와 좌선을 할 때 심연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넘치듯 깊은 희열이 느껴지곤 했다. 허락되지 않은 음악감상이라서인지 마음에 스며드는 선율이 더 강렬하고 깊었는지도 모르겠다.
3악장 피날레 부분의 자신감 넘치고 웅장한 선율은 내 수행길도 그렇게 힘차게 걸어가길 약속하게 했던 악장이기도 했다.
몇 년간은 내 생활에서 완전히 음악을 외면하고 살았던 시간도 있었다. 어느 여름 비바람이 몰아치는 산사에서 장중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감상하는 착각에 빠지고 난 뒤에 나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봄비에 풀잎 피어나는 소리,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가을 풀벌레 소리, 솔밭에 바람 지나는 소리, 겨울 바람에 문풍지 떠는 소리,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산사에 가을 햇살 내리는 소리에까지 마음의 귀를 기울이곤 했다. 허나 또 무슨 인연인지 방송에서 음악프로를 진행한지 5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세상이 변하고 시간이 많이 흘러가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감상하며 약속했던 것처럼 그렇게 걸어갈 것이다.
진명스님 불교방송 '차 한잔의 선율'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