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가혹함’을 절감하는 사람은 요즘 한국 사회에도 많을 것 같다. 대선을 앞둔 폭로정치의 계절, 꼬리를 무는 각종 대형 비리사건 앞에 보통 사람들은 도덕 감각조차 총체적으로 마비될 지경이다. 병풍을 둘러싼 각종 조작극 시비, 서해 교전 정보보고 축소 지시, 현대 상선 4000억원 대출 등…. 전해 듣는 보통 시민들이야 놀라고 분노하다가 결국 무관심해질 수도 있지만 사건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정확한 진실을 알 것이다. 이들에겐 진실이 가혹한 정도를 넘어서서 감당 못할 괴물처럼 두렵게 느껴질지 모른다.
▷혁명기의 프랑스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 공통점으로는 경제적 곤경과 정치적 혼란 속에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원한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점 가운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 프랑스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면 된다고 믿은 데 비해, 요즘 우리 사회 사람들은 일거에 완벽하고 이상적인 변화가 생긴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점이 아닐까. 이런 태도를 냉소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민의식이 그만큼 원숙해졌으며, 민주주의적인 제도와 장치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험이 많아지면 의식도 원숙해진다. 각종 비리의 주인공 당통도, 엄정했지만 냉혹하고 완고했던 로베스피에르도 모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우리 사회는 그에 못지않은 아픔과 굴곡이 새겨진 역사의 파노라마를 거쳐왔다. 그런 과정을 견디면서 사람들이 체득한 의식의 무게만큼 민주주의도 성장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기에서처럼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더라도 우리 시민들은 진실을 감지하는 힘이 있으며 그것을 심판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비리를 저지른 몇몇 사람이 자신들에게 가혹한 진실을 애써 덮으려 해도 성숙한 시민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김장권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교수·정치학 jk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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