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천광암/‘임기내 타결’ 이 최우선?

  • 입력 2002년 10월 23일 17시 25분


“칠레가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제외하자고 요구한 ‘외국인투자촉진법(DL 600)’의 내용이 뭔지 몰라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과 칠레간 FTA 타결 여부 결정을 24일로 미루면서 재정경제부 당국자가 한 설명이다.

두 나라는 협상을 시작하기 전인 1999년 두차례에 걸쳐 서로 궁금한 내용을 문서로 묻고 답변했다. 당시 한국측이 질의서 작성의 기초로 삼은 세계무역기구(WTO)의 ‘WT/TPR/S/28’ 보고서에는 DL 600이 뭔지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칠레는 유럽연합(EU)과의 FTA협상에서 ‘금융부문’을 포함하면서도 DL 600은 제외했다. ‘DL 600 제외 요구’는 이미 예견된 셈이다. 재경부가 협상 막판에 “DL 600을 검토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얼마나 준비가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더구나 DL 600보다 훨씬 중요한 현안인 금융부문에 대해서는 이제야 금융기관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정부 부처 내의 준비 상황이 이런데도 외교통상부는 FTA 타결을 서둘렀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임기 내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몇 달 전 본보 기자 몇 명과 만나 “현 정부 임기 안에 한-칠레 FTA를 꼭 마무리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칠레와의 FTA 타결은 ‘지역주의’가 확산되는 세계무역질서를 감안할 때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그 자체의 경제효과는 크지 않다. 한국은행이 이번 FTA 타결에 따른 연간 무역수지 개선효과라고 추산한 2000만달러는 지난해 한국 흑자액의 0.2%에 불과하다.

양국 FTA가 중요한 진짜 이유는 ‘FTA 외톨이 신세’에서 벗어난다는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앞으로 다른 나라와 협상을 할 때 두고두고 ‘교과서’가 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충분한 검토 없이 한-칠레 FTA를 서둘러 타결했다가 나중에 더 중요한 나라와의 FTA 협상에 짐이 되면 곤란하지 않을까.

통상(通商) 협상의 잣대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국익(國益)’이어야 한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 ‘임기 내 타결’과 같은 정치적 잡음(雜音)이 섞여서는 결코 안 된다.

천광암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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