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입구의 십리 길을 일러 홍류동(紅流洞)이라 부르는 이유가 가을엔 더 분명해진다. 붉은 단풍 빛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데 그 길이가 구곡(九谷)이나 된다. 역시 해인사는 가을 단풍이 일경(一景)이며 저녁 종소리가 이경(二景)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가을 풍경 덕분에 서너 차례 가야산을 오르면서 새삼 깨달은 바가 한 가지 있다. 하루는 주위의 단풍이 너무 아름다워서 숲 그늘에 앉아 있기도 하고 계곡에서 땀을 씻기도 하면서 산을 올랐는데 어느새 목적지가 나타났다. 정말 그 날의 산행은 힘들지도 않았으며 멀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그동안 나의 산행은 목적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이었다고 한다면, 그 날의 산행은 걸어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거리를 두고도, 목적을 즐기는 사람은 ‘한 시간이나 더 가야한다’라고 말하지만 과정을 즐기는 사람은 ‘아직 한시간이 더 있다’고 말한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목적이 기준이 되면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순간 순간의 존재 의미가 스스로에게 주어진다.
예를 들어, 돈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리면 돈을 버는 과정의 시간은 의미가 줄어들고 만다. 천 원을 남기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하루가 불행하지만, 천 원을 쓸 수 있는 조건에 감사하면 하루가 행복하지 않을까.
영화 필름은 잘라 놓으면 한 컷 한 컷이지만 연결하면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 삶의 한 컷 한 컷에는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이 따로 찍혀 있지만 인생의 필름에서는 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행복만 있다면 인생의 드라마는 박진감이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이, 살아가는 현장이어야 한다. 미래에 초점을 너무 맞추면 현재의 시간은 낭비가 되기 쉽다. 수행 역시 깨달음이 목적이 아니라 수행하는 과정 자체가 깨달음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해인사 포교국장 buddha122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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