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두 천재는 닮았다 ´아인슈타인·피카소´

  • 입력 2002년 10월 25일 17시 33분


◇아인슈타인·피카소/아서 I 밀러 지음 정영목 옮김/564쪽 2만2000원 작가정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스위스 베른에서 1905년 발견한 ‘상대성이론’을 중력의 문제로까지 확장하고 있던 1907년, 파블로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에서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완성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뉴튼의 물리학을 넘어 20세기의 새로운 과학시대를 열었고,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통해 표현된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미술계에서 전통적 원근법을 전복시켰다.

20세기 초 과학과 예술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분야에서 동시에 ‘혁명’을 이룬 이 두 천재는 살아 있는 동안 서로 교류를 가진 적이 없다. 그러나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런던)의 밀러 교수(과학철학 및 과학사)는 이 둘 사이의 공통점에 주목했다.

당시 이 두 천재가 자기 분야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모든 사고와 행위를 전개했던 19세기적 방식을 넘어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존해 왔던 인식의 영역 밖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시간과 공간의 관념을 새로이 설정하며 20세기를 앞서 갔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 깨달았고 피카소는 화폭 위에서 깨달았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을 발견한 후 지각에 의존하는 실증적 실험의 한계를 넘어서 ‘사고 실험’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상대성이론에 다가갔다. 피카소는 하나의 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원근법을 무너뜨리고 동시에 여러 가지 시점에서 바라본 4차원의 입체를 2차원의 화폭 위에 펼쳐 놨다.

당시 자동차, 비행기, 무선 전신과 같은 기술의 발전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뒤흔들고 있었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는 시간과 공간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고, 기존의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다가갔다. 아인슈타인의 직관과 피카소의 실험정신 앞에서 이성적 판단을 기반으로 한다는 과학과 감성적 직관에 의존한다는 예술의 경계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밀러 교수는 또한 두 사람 사이에서 앙리 푸앵카레라는 인물을 발견했다. 두 천재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모두 푸앵카레의 저서인 ‘과학과 가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되던 푸앵카레는 4차원에 대한 견해를 비롯해 수학, 철학, 과학과 관련된 광범위한 영감을 이들에게 제공했다.

아인슈타인/피카소

이 무렵 과학과 예술 분야에는 푸앵카레를 비롯해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있었지만 새로운 과학과 예술의 시대를 연 천재로 남은 것은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뿐이었다. 저자는 이 둘만이 그런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를 ‘결정적인 순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통적 방식과 기존의 편견을 넘어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해 갔다’는 데서 찾았다.

밀러 교수에 따르면 이밖에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연인들과의 사랑을 이용해 위대한 창조의 동력을 얻고는 그 연인들을 매정하게 버리는 것까지도 똑같았다는 것이다.

마침 피카소에 관한 책이 두 권 더 번역 출간됐다. 피카소와 그의 이발사 사이의 우정을 다룬 ‘피카소의 이발사’(시공사)와 피카소의 손녀가 바라본 할아버지 이야기인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효형출판). 독일어와 프랑스어 원본의 표지를 그대로 따르다 보니 두 책은 우연히도 표지가 거의 같아졌다. 피카소의 인상적인 대머리와 클로즈업시킨 강렬한 두 눈이 인상적이다.

피카소 책만 많이 나와서 아인슈타인이 서운해 할까? 어차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과학철학 및 과학사 전공자인 밀러 교수조차 아인슈타인보다는 피카소 이야기를 훨씬 많이 한다. 그래도 제목은 ‘피카소·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아인슈타인·피카소’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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