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盜聽, 이 지경까지 왔나

  • 입력 2002년 10월 25일 18시 14분


한 현직 장관은 외출 때 휴대전화가 있는데도 공중전화를 사용한다고 한다. 경찰 고위간부도 도청이 두려워 휴대전화번호를 자주 바꾸고, 웬만한 기업이면 사무실마다 도청방지장치에 e메일 보안시스템까지 설치한다. 원내 제1당의 대통령후보는 최근 도청방지용 휴대전화를 구입했다고 하고, 어느 전직 총리는 휴대전화를 5개씩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도청공화국’이란 말이 실감되는 예들이다.

‘도청 공포’는 어느새 관(官)에서 정당 기업체 언론사 등 사회 모든 분야로 확산됐다. 심지어 검찰청까지 보안점검을 강화해야 할 지경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일반 국민인들 마음놓고 전화 한통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권력기관의 도청설이 나올 때마다 절대 도청은 없다고 펄쩍 뛰었지만 정부 고위공직자마저 도청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셈이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러한 때에 국가정보원이 휴대전화 도청용 첨단장비를 대폭 늘렸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은 유감이다. 국정원측은 당연히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두고 볼 일이다. 어차피 정권이 바뀐 다음에야 정확한 사실이 검증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도청 의혹은 이번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은 나흘 전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이 검찰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현대상선 4000억원 대출건에 대한 계좌추적을 하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폭로하면서 통화내용을 국정원 도청자료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정 의원은 이에 앞서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 로비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박지원(朴智元)-요시다 다케시(吉田猛) 뒷거래설’ 등도 국정원이 도청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원이 ‘도청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하려면 도청설의 진위를 명백히 가려야 한다.

통신의 비밀 보장은 국민의 기본권이다. 국민은 ‘도청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고 정부는 그것을 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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