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예산 나눠먹기엔 與野도 없다

  • 입력 2002년 10월 29일 18시 58분


여야로 갈라져 창피한 줄도 모르고 으르렁대던 국회가 군소리없이 합의할 때가 있다. 나눠먹기식으로 예산을 늘리거나 국회의원 세비를 인상하는 경우가 그렇다. 시급한 민생법안이나 제도 개혁에는 쓸데없이 싸우고 늑장을 부리던 국회가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일에는 여야가 따로 없이 담합하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국회가 내년도 예산을 심의하면서 정부안보다 4조원이나 늘린 것은 국민의 혈세를 도둑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임위 심사 과정에서 늘어난 비율이 예년의 배에 이르고 예산을 삭감한 상임위는 한 곳도 없다니 예산을 심의한 것인지, 아니면 세금으로 잔치를 벌이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내년은 새 정권이 시작하는 첫해일 뿐 아니라 국민의 혈세로 공적자금을 상환하는 첫해가 된다.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예산을 심의해 불필요한 지출을 막아야 한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대통령선거라는 국민의 심판을 앞두고 진지하게 예산을 따져보아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은 예산심의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듯하고 한나라당은 ‘내년 예산은 우리가 쓸 돈’이라는 식으로 벌써 집권당이나 된 듯이 인심을 쓰고 있다고 하니 한심한 일이다. 한나라당이 청와대나 국정홍보처 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여성 국회의원용 사우나를 설치한답시고 국회 예산을 증액했다는 운영위의 심의 결과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런 국회를 믿고 나라살림을 맡겨야 하는가. 시민단체인 경실련이 엊그제 내년 예산 중에 타당성이 결여된 사업에 배정된 8000여억원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국회는 반성해야 한다. 국회가 시민단체보다도 성의없이 예산을 다룬다면 창피한 일이 아닌가.

타당성이 떨어지는 사업 예산을 줄여 국민의 세 부담을 더는 일은 국회의 기본적인 책무이다. 정부 예산안을 삭감하기는커녕 더 늘린다면 국민의 대표로서 자격이 없다. 국회는 국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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