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군 위안부 문제 등 아직도 우호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지만 월드컵을 계기로 두 나라 국민의 상호인식이 극적으로 호전된 것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월드컵으로 한일관계 호전▼
이러한 월드컵의 성과를 바탕으로 7월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정상회담을 갖고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양국관계를 더욱 심화 발전시킬 것을 결의한 ‘미래를 향한 공동메시지’를 발표했다. 또 10월 7일에는 양국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한일 문화교류회의’가 앞으로의 문화교류 확대를 다짐하는 ‘서울선언’을 채택했다. 지난 주말 일본 도쿄에서 연세대와 와세다대 공동 주최로 열린 ‘한일 밀레니엄 심포지엄 2002’는 그 부제(副題)인 ‘신세기의 한일관계-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에서 나타나듯 월드컵 이후의 협력관계를 공동 설계하기 위해 최초로 마련된 양국 전문가들의 진지한 토론모임이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과 핵개발 계획 시인이 몰고 온 파문의 와중에서 열린 탓도 있지만, 토론의 핵심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한일 양국이 앞으로 어떻게 상호 협력해 나갈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일 양국이 주축이 되어 동아시아공동체를 되도록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 분위기였다.
이 공동체 설립계획은 작년 브루나이에서 열린 제5차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동아시아비전그룹(EAVG)이 제출한 보고서에서 제시되었는데, 주로 경제협력에 중점을 둔 내용이었다. 이에 비해 이번 도쿄 심포지엄에서는 경제뿐 아니라 안보 문화 분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동아시아의 평화(peace) 번영(prosperity) 발전(progress)의 3P를 목표로 하는 이 공동체는 중국 일본 한국(CJK)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중국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제휴가 효과적이라는 것이 공통된 견해였다.
지금의 일본은 한국을 얕잡아보고 내려다보던 과거의 일본이 아니다. ‘21세기의 동북아 전망’을 주제로 강연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는 지난 10년 동안 일본에서는 10명의 총리가 바뀌어 정치불안의 대명사인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처럼 되었다고 일본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한일 양국의 협력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금은 대선 때문에 더욱 그렇지만 우리 정치지도자들의 관심은 국내 문제에만 쏠려 있다. 올해 한국과 중국에서는 우연히도 거의 동시에 지도자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 우선 한국에서는 12월 대선에서 양 김씨 이후의 새 세대가 국가지도자로 출현한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에 이은 제4세대가 등장하고,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도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 이은 제3세대 지도자이다. 21세기 들어 CJK 3국은 모두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가 이끌어가는 시대를 맞는 셈이다.
▼동아시아공동체 결성 필요▼
현재 주목을 끌고 있는 대선 후보들은 모두 87년 민주화 이후 정계에 입문한 사람이다. 이들은 정치개혁 등 국내 문제뿐 아니라 동북아 평화문제에 관해서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도 아직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가 지역별로 블록화, 통합화되는 경향이 강한 가운데 유일한 예외로 남은 지역이 동북아시아이다. 겨우 ‘ASEAN+CJK’라는 이상한 모습의 협력체를 형성하고 있다. 지역 내에서의 패권국가 등장을 막고 주변 강대국들의 협력 아래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유럽의 안보협력체제 같은 동아시아공동체 결성이 필수적이다. 이제 우리 정치는 밖으로도 눈을 돌릴 때가 됐다.
남시욱 언론인·성균관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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