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문명호/유럽대통령

  • 입력 2002년 10월 30일 18시 26분


유럽이라는 지명은 고대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메소포타미아에 걸친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해가 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던 일반명사 ‘에레브(ereb)’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살던 곳을 기준으로 할 때 해가 지는 곳은 오늘날의 유럽이었다. ‘에레브’는 그 후 영어의 ‘유럽’, 프랑스어의 ‘외로프’, 독일어의 ‘오이로파’, 러시아어의 ‘예브로파’ 등에서 보듯이 많은 유럽 국가에서 이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정착되었다. 유럽 국가들이 많은 공통점을 지닌 이른바 ‘유럽문명’을 발전시켜 오고 ‘하나의 유럽’을 꿈꾸어 온 데는 이처럼 일찍부터 유럽이라는 명칭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작용을 한 게 아닐까.

▷유럽연합(EU)의 일종의 제헌기구인 ‘유럽의 미래에 관한 회의’는 2004년 회원국 25개국의 국가연합체로 개편되는 EU의 헌법 초안을 29일 공개했다. 초안은 국가연합의 명칭을 유럽연합과 유럽공동체, 연합유럽, 유럽합중국 중에서 고를 것을 제안했다. 아울러 새 국가연합에는 임기 5년의 대통령과 외무장관제, 유럽의회와 회원국 의회 의원들로 구성되는 의회를 두도록 했다. 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출범으로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헌법, 하나의 의회, 하나의 정부로 이루어지는 유럽’이라는 오랜 꿈의 실현을 향하여 성큼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새 헌법 초안은 현재의 집행위원장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대통령제의 신설 등 여러 점에서 미국의 헌법을 연상케 한다. 유럽의 미래에 관한 회의 의장인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도 미국 헌법을 모델로 삼았음을 시사했다. 새 명칭으로 제시된 4개안 중에서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은 더더욱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을 연상시킨다. 영국은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이 명칭대로라면 회원국의 지위가 미국의 한 주(州) 정도로 여겨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명칭만으로 국가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우려는 결국 유럽의 자존심이 손상당하기 싫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떤 국명을 갖게 되든 새 유럽국가연합은 영국의 우려처럼 ‘제2의 미국’이 되지는 않을 공산이 크다. ‘중앙의 통제가 강화된 유럽’에 대해 작은 나라들의 우려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벨기에 네덜란드 등은 더구나 대통령제는 자기들을 ‘2등 회원국’으로 강등시킬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그런저런 이유로 ‘유럽 대통령’이 탄생한다 해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같은 ‘강력한 대통령’은 못될 것이라는 느낌이다.

문명호 논설위원 munm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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