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속 쏟아지는 실업자▼
몇 년 전 한 논문에서 구보씨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6년 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8.3%였다. 늘어나도 시원찮을 그 숫자는 지금 48.1%로 쪼그라들었다. 절반이 넘는 여성들이 가사 육아 등 ‘비공식 경제부문’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회구성원을 재생산하는 비용을 ‘개별’ 여성, 그것도 경제력이 취약한 젊은 여성에게 전담시키는 왜곡된 구조는 오히려 대대적 출산기피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조만간 대학진학 인구와 경제활동인구의 격감으로 이어져, 구보씨의 직업 자체를 압박하고 그 노후를 불투명하게 만들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선 구보씨. 오늘은 4학년 수업이 있는 날이다. 요즈음 졸업반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정글로 밀려나가는 토끼들 같다. 헌법은 ‘개인의 자율과 창의(제119조)’니 ‘직업을 선택할 자유(제15조)’니 하는 말들을 번지르르 늘어놓고 있지만, 명색이 헌법 선생이랍시고 그걸 가르치는 구보씨의 속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마치 저 토끼들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기에 이토록 뻔뻔한 사기를 친단 말이오’라고 묻고픈 굴뚝들을 하나씩 갖고서 그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다.
이 졸업반 대학생들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수가 사회로부터 ‘할 일’을 받지 못하고, 그 황량한 삶의 주위를 기약 없이 방황해야 한다니. 차라리 봉건제나 길드제는 세상 탓, 부모 탓으로 비난을 돌릴 숨구멍이나 터 주었지. 이 시장지옥은 바늘구멍만큼의 생로를 뚫어놓고 못 빠져나가면 네 탓이라며, 핑계를 댈 자유마저 봉쇄하는 것 아닌가. 헌법이 정한 ‘인간다운 생활(제34조)’에 대한 최소한의 ‘눈에 보이는’ 보장 없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시장의 정글 속을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겠는가.
1970년대 문제작가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라고. 멀쩡한 부녀자들을 유흥의 제물로 내몰고, 성실한 대학생들을 실업의 바닥에 내팽개치는 것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 또 폭력이란 말인가. 고작 이만큼의 ‘사회적 연대’에도 힘이 부쳐 헉헉대는 것이 우리의 국가라면, 지난 반세기 동안 피로써 이룩한 우리의 헌정사는 대관절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갈라선 절반에 대한 아스라한 동경으로만 남았던 건국헌법의 ‘사회적 기본권’ 조항, 1962년 헌법 이래 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 유보되어야만 했던 ‘국민경제의 균형성’ 조항. 이 조항들이야말로 우리 헌법이 힘써 나아가야 할 바다. 현행헌법의 이 ‘휴면 조항’들을 되살리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에 더 이상 미래는 없다는 것이 구보씨의 판단이었다.
흥겨워야 할 민주주의의 굿판, 대통령 선거가 바로 지척이건만 국민의 관심은 냉랭하기 짝이 없다. 국민의 탓으로 돌릴 일이 못 된다. 정치가 국민에 관심이 없으니, 국민이 정치에 관심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헌법 ´휴면조항´ 살려야▼
구보씨는 질문한다. 햇볕정책의 ‘전도사’들이여, 과연 우리의 국가는 북녘에 ‘햇볕’을 나누어 줄 만큼 충분한 ‘온기’를 지녔다고 정녕 믿고 있는가. 김정일 체제는 당신들 권력의 정당성을 연금(鍊金)하는 ‘미다스의 손’이 되지 못한다. 이제 그 숭고한 ‘신앙’을 세속적 ‘정책’의 자리로 끌어내릴 때도 되지 않았는가. 제1당의 대통령후보와 그 지지자들이여, 기존의 ‘연 6% 성장률’을 5년간 지속시켜 실업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장밋빛 공약으로 선거에 임하면서 알량한 ‘30%대 지지율’이 유지되리라 믿는가. 당신들이 외치는 ‘법대로’가 기득권자의 ‘이대로’가 아니라는 구체적 증거를 보여달라.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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