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그럼 나도 가야 하는 거야? 내 일은….”
일하는 여성들에게 남편의 해외 근무나 외국 대학의 입학 통지서가 희소식만은 아니다. 남편 혼자 떠나 보내기는 싫다. 하지만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면 돌아와서는 어떻게 하나. 전업 주부들도 기대 반 고민 반이다. 남편의 외국행이 나를 위해서도 기회이기를 바라지만 외국에서 생활한다고 새 길이 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을 따라 나선 길에 자신의 새 길도 발견하고 돌아와 활기차게 일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우연히 마주친 새로운 길
김숙희 SL 트레이딩 사장(40)은 홍콩에서 고급 은 주얼리를 수입해 판매하는 무역 회사를 경영한다. 88년 국비 장학생인 남편과 함께 미국 텍사스 주립대로 향할 때만 해도 함께 계속 공부하기로 한 심리학 석사였다.
“너무 피곤해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하더군요.”
계획보다 일찍 들어선 아이. 심한 입덧으로 김 사장은 한 학기 만에 휴학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김 사장은 더 이상 공부할 마음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딸에 대한 기대가 컸던 친정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뭐라도 좀 해보라”는 어머니 말에 김 사장도 일거리를 찾아보았지만 인구 7만명의 대학촌인 칼리지 스테이션시에서 공부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답답하기가 딸보다 더했던 어머니는 미국 현지에서도 찾지 못한 일거리를 한국에서 찾아냈다. 미국보석감정연구소(GIA·Gemological Institute of America)의 보석 전문가 과정(GG·Graduate Gemologist)이었다. 어머니가 일러준 GIA코리아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 미국인데요, GIA 본사 연락처 좀 알려주시겠어요?”
외국계 기업 전문 홍보회사인 KPR에 근무하는 김수미 부장(42)은 96년 미국의 경제 전문 통신사인 다우존스 서울지국장 자리를 그만뒀다. 96년 런던 지점으로 발령난 은행원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떠나야했기 때문이다.
“그 좋은 직장 두고 왜 가느냐”고 주변에서 말렸다. 김 부장도 “돌아오면 마흔이 넘을텐데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망설였다.
고민 끝에 김 부장은 확실히 ‘업그레이드’ 돼 마흔을 맞자고 마음 먹었다. 영국에 도착한 지 1년 후인 97년 가을학기에 런던의 시티대 비즈니스스쿨에 등록했다. 영국의 랭킹 5위 안에 들어가는 경영학석사(MBA) 과정이었다.
●아줌마의 공부를 방해하는 것들
김 부장의 MBA 클래스에는 서른을 갓 넘긴 직장 경력 3, 4년차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마흔을 눈 앞에 둔 김 부장은 체력적으로 열세였다. 10년 넘게 영자지 기자로 일했던 김 부장은 리포트 작성은 자신 있었지만 토론 위주의 수업 시간은 힘들었다. 자신의 생각의 속도를 넘어서 말을 쏟아붓는 동료들 속에 김 부장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내조에 전념해주기를 기대하는 남편 회사쪽 사람들의 태도도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했다.
아이가 없었던 김 부장과 달리 김 사장은 4년 터울로 생긴 아이들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GIA는 캘리포니아의 샌타모니카에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발목 잡힌 김 사장은 집에서 공부할 수 있는 통신 과정을 택했다. 직접 수업에 참여했더라면 6개월에 끝냈을 과정을 3년 만에 마쳤다. 아이들을 재운 뒤 밤에 1, 2시간 집중해서 공부했다. 쏟아지는 잠도 잠이었지만 문과 출신인 김 사장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보석 관련 용어들이었다. 과정 중 3번은 직접 학교에 가서 실험을 해야 했다. 남편의 방학 때를 기다려 온 가족이 샌타모니카로 날아갔다. 김 사장은 수업을 듣고 남편과 아이들은 해변에서 기다렸다. 친정 부모가 보내주는 학비가 부족해 미국 꼬마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교습도 했다.
“주위에 GG 과정에 관심있는 한국인 주부들이 많았지만 저를 포함해 두 사람만 수료를 했어요. 한국에도 분교가 있는데 굳이 미국에서 애들 데리고 힘들게 공부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핑곗거리는 널려 있고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감은 절로 떨어지지 않는다
김 사장은 95년 가을 귀국했다. 30대 중반의 여성을 모셔가겠다고 나서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김 사장은 GIA 코리아를 찾아 이력서를 제출했다. 3개월쯤 지나 GIA 코리아에서 동문회 간사 자리가 비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월급도 적을 뿐만 아니라 전화 받고 동문들에게 소식지를 발송하는 초라한 자리였다. 자존심 상했지만 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김 사장은 간사 일을 맡아 인터넷이나 외국 잡지에서 업계의 최신 정보들을 찾아 보고서를 만드는 등 시키지 않는 일까지 찾아 열심히 했다.
6개월 후 GIA 코리아에서 강사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동문회 간사로 ‘업계’와 맺은 인연은 그 후 대학 귀금속 공예과 강사, 업계 전문지 편집장, 홈쇼핑 채널의 게스트, 보석회사의 홍보실장, 그리고 창업으로 이어졌다.
“직장을 선택할 때는 월급이나 대우보다는 내 경력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일하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저 사람에게 일을 주면 칼같이 하더라’는 신뢰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요. 결국 그 사람들이 일을 주는 것이거든요.”
김 부장도 ‘인연이 새 일거리를 찾아준다’는 데 동의한다.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2000년 귀국한 뒤 김 부장은 헤드헌팅 업체 여러 곳에 이력서를 내놓았다. 이력서에는 MBA 졸업과 영국 현지 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턴트 보좌역으로 근무한 경력 두 줄이 추가됐다. 그러나 경력사원 시장에서는 연봉 부담이 적은 30대 중반을 선호하는 추세였다. 현재 일자리는 옛날의 인맥을 통해 구했다.
“실무 교육 위주의 MBA과정과 현지 회사, 봉사단체에서 영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해본 경험으로 제 능력이 한 단계 올랐다고 자신합니다. 타 문화의 사람들을 만나 직접 부대끼며 일하는 데 대해 두려움이 없어진 거죠.”
김 부장은 아이를 낳고 휴직 중인 요즘에도 재택근무를 하며 한글 자서전을 영문으로 번역하기, 국제 경제회의 준비하기 등의 일감을 처리하고 있다. 내년 2월 스위스에서 개최될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발표할 리포트의 코디네이터로도 일하고 있다. 18개월된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쯤엔 외국계 기업을 대상으로 한 컨설팅 전문 회사를 차릴 계획이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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