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상식 안 통하는 사회…‘덕’이 그립다 ´덕의 부활´

  • 입력 2002년 11월 1일 17시 46분


◇덕의 부활-의무 윤리의 좌절과 덕 윤리학의 재등장/마이클 슬롯 글 장동익 옮김/382쪽 1만5000원 철학과현실사

모든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그것의 의미가 이미 실종되었거나 약화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법치주의가 우선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우리의 삶이 적나라한 생존경쟁으로 축소되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의문이 고개를 드는 것이 그렇다. 어떤 것이 부활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어 있어야 한다.

덕의 부활은 이처럼 덕의 상실을 전제한다. 우리는 서양인을 ‘이기적’이라고 매도하면서 동양에는 인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덕성이 있다고 즐겨 말하지만, 우리 동양인에게도 덕성은 이미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서양인은 이기주의의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이해관계의 충돌을 규제할 수 있는 ‘의무’와 ‘책임’의 도덕성(morality)을 발전시킨다면, 우리 동양인은 인간다운 성품에 바탕을 둔 덕성(virtue)을 계발해 온 것은 사실이다.

사회가 분화하고 개인주의가 보편화되면 될수록, 민주주의는 사회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를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의무의 도덕성을 더욱 더 강조하게 된다. ‘덕’은 개인의 문제이고 ‘도덕성’은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법이 통한다면, 우리의 상식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 각자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추구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법이 효력을 상실하면 할수록 상식이라도 지켰으면 좋겠다는 자탄의 목소리가 커진다. 인간이 도덕 공동체에 속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상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다시 한번 인간의 덕성을 돌아보게 된다. 때맞춰 번역된 마이클 슬롯의 ‘덕의 부활’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물론 서양에서 논의되는 덕 윤리는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이기적 행위자들의 상호관계로 파악하는 기존의 의무론과 공리주의가 한계에 도달하였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행위의 동기에 초점을 맞춘 의무론은 행위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행위의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는 도덕성을 이익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근본적으로 일부는 친절하지만 다른 일부는 비열할 경우에 발생한다. 모두가 친절하게 행동하거나 모두가 비열한 경우에는 도덕이 필요 없거나 무의미해진다. 문제는 친절한 사람이 비열한 사람과 충돌할 때 발생한다. 의무론은 비열한 사람에 대해서도 비열한 방식으로 되돌려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공리주의는 협조를 거부함으로써 상호 이익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더 좋은 것을 행할 수 있는데도 자신의 선을 추구하도록 허용한다. 이에 반해 덕 윤리는 좋은 성품을 지니는 것이 그 소유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상식을 도덕이론으로 발전시킨다.

이 책의 강점은 물론 현재 지배적인 의무론과 공리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덕 윤리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커다란 미덕은 인간의 행위에는 그 동기나 결과와 관계없이 칭찬하거나 통탄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상식을 도덕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문화에서도 위험에 맞서는 ‘용기’는 칭찬하고, 상황과 이익에 따라 처신하는 ‘간교함’은 통탄한다.

덕 윤리의 창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성품을 실현하는 좋은 본보기가 사회에 많이 보인다면 더 이상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를 물을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좋은 성품은 오로지 도덕적 행위의 실천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성품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왜곡된 이기주의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의가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좋다’는 이 책의 메시지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덕성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이진우 계명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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