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심의가 중요한 것은 단지 규모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너와 내가 돈을 어떻게 내고 어떻게 쓸 것인가를 미리 계산한 것이 예산이다. 그런데 ‘공유의 비극’이니 ‘투표자의 합리적 무지’니 하는 말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내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고, ‘우리 것’에 대해서는 둔감한 편이다. 한 인터넷 회사가 사운(社運)을 걸고 결정한 유료화조치에 대해서는 네티즌들 사이에 난리가 나지만, 천문학적인 우리의 돈인 나랏돈의 짜임새나 쓰임새에 대해서는 모두가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면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국회는 정부가 나랏돈을 어떻게 걷고 쓸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세밀하게 제대로 짚어보아야 한다.
▼정쟁에 대선에 예산심의 뒷전▼
그러나 예산심의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지 않고 있다. 절차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이 땅에 제대로 도입되기 시작한 13대 국회부터 16대 국회까지 예산심의에 관한 한 국회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16대 국회만 하더라도 2000년과 2001년 예산심의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재연한 바 있다. 2001년과 2002년 예산안 모두 법정기한을 훨씬 넘긴 채 임시국회에서 처리되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제도와 법과 질서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정부 예산안을 철저하게 해부하다가 시간을 넘겼더라도 비난받을 일인데, 예산안이 정쟁의 수단과 볼모로 전락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번 정기국회는 대선을 핑계로 약 한 달 일찍 막을 내릴 예정이다. 지난 2년은 정쟁 때문에 약속을 어기고, 금년은 대선이라는 ‘각 정당의 명운이 걸린 문제’ 때문에 나랏돈의 짜임새에 신경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 시간이 단축됐다면 밤새워 의사당의 불을 밝혀놓고 국민의 돈을 한 푼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인데 이런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상임위와 예결위라는 2단계 심사구조의 문제와 이에 따른 일관성 상실 문제 역시 여전하다. ‘상임위는 대폭 증액’, ‘예결위는 정부안 대비 소폭 삭감’이 국회 예산결정의 전형이다. 올해 역시 4조원 가까운 돈이 상임위에서 증액되었다. 해당 부처와의 동질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상임위의 예산증액은 정부의 재정팽창 기조를 비판하는 야당의 기조에도 어긋난다.
상임위의 예비심사는 구속력도 없고 예비심사와 종합심사가 따로 놀다보니,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담합과 끼워넣기가 늘 등장하곤 한다. 재선과 재집권 또는 정권창출이 목적인 국회의원에게는 생색나고 표가 되는 사업의 증액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와중에 국민의 담세율을 저하시켰다는 상징성도 확보할 수 있는 묘수가 ‘총론은 삭감, 각론은 증액’의 예산결정 행태다. 그렇다 보니 재해대책비, 공적자금 이자, 예비비 등 손쉽게 추경을 편성할 수 있는 항목들을 삭감하고, 지역 숙원사업과 공약사업 등을 증액하기 일쑤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예산심의 단계별 삭감과 증액의 일관성 문제가 늘 불거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임위와 예결위의 권한조정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검토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고쳐야 할 제도 산적했는데…▼
마지막으로 현행제도에서 국회 예산심의의 핵심고리는 ‘예산안 조정 소위원회’이다. 계수조정에 있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위원회는 소수에 의한 비공개 결정을 특성으로 하고 있다. 현행법상 소위의 공개는 원칙이지만, 여전히 ‘형식상의 공개’라는 비판이 그치지 않고 있다.
국회 예산심의가 제자리를 잡으려면 고쳐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예산심의 제도와 관행 모두 고칠 필요가 있다. 그릇된 관행을 고치고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내는 일은 길고도 고된 여정이다. 다만 과거에 비해 조금씩 나아지는 국회의 모습에서 희망의 빛을 찾아본다.
임동욱 충주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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