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민주당을 탈당한 김원길(金元吉) 의원의 일갈(一喝)인즉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와 ‘국민통합 21’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졸지에 ‘역적’이 될지도 모를 판이다. 두 사람이 김 의원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노 후보는 단일화를 하려면 최소한 국민경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정 의원은 경선은 무슨 경선이냐, 시간도 없는데 그냥 둘이서 합의하자는 것인데 그 속내란 당신이 내게 양보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니 억지라면 모를까 제물에 궁합이 맞기는 틀린 노릇일 듯 싶다.
▼벌거벗은 정치 셈법▼
그야 어떻든 ‘만고의 역적’이라는, TV 사극(史劇)에나 나옴직한 군내 나는 대사에는 별 울림이 없다. 그 어떤 정치적 상상력도 끌어내지 못한다. 정치의 언어는 그 수용자인 국민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노-정이 단일화되면 세상이 정말 ‘통합과 개혁’의 방향으로 진전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후보단일화의 논리는 지극히 궁핍하고 모순적이다. 따라서 여기서 무슨 희망의 상상력을 끌어내기는 어렵다. 후보단일화의 명분은 국민통합 및 평화적 개혁세력이 지역분열 및 냉전적 기득권세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자면 노-정 단일화가 과연 통합 개혁세력인지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통합과 분열, 평화적과 냉전적이란 이분법적 구도와 국민통합의 모순이다. 이런 흑백논리식 이분법으로는 국민통합을 이뤄낼 수 없다. 하기야 서로 너무 다른 노-정 두 사람을 놓고 통합을 얘기하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 아닌가.
그러고 보면 후보단일화란 애초 벌거벗은 정치 셈법에 지나지 않는다. 오로지 ‘이회창(李會昌)의 대항마’로서 노-정 중 누가 유리하냐는 셈법이다. 그런데 이 셈법에서 국민은 도구이고 관객일 뿐이다. 도구란 국민이 여론조사의 대상자라는 것이고 관객이란 다수 국민이 여론조사 결과에 근거한 정치권의 셈법을 수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 지도자를 선택하는 선거는 이미 ‘지지율 게임’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제 초읽기에 들어갔다. 후보등록을 하는 27일부터는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할 수 없다. 따라서 26일 직전에 공개되는 여론조사 결과는 각 후보에게 실로 사활적(死活的)이다.
지난 대선 때를 보자. 1997년 10월 중순 고작 13%대였던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김대중 35%, 이인제 23%)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11월 들어 20%대로 올라서고 11월 중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에게서 2위 자리를 탈환한 데 이어 후보등록을 앞둔 24일에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 오차범위 내(김대중 33.8%, 이회창 32.2%)로 접근한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혼전양상이 된 것이다.
5년 전 이맘 때에 비춰보면 노 후보나 정 의원이나 10여일 안에 확실한 2위로 올라서고 후보등록 이전에 이 후보에 바짝 따라붙어야 한다. 말 그대로 초읽기 다툼이다. 그런데 민주당 사람들은 후보단일화를 해야 한다며 우르르 탈당을 하고 있다. 겉으로야 노-정 중 누가 단일후보가 돼도 좋다지만 속은 ‘노(盧)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니 그렇지 않아도 갈길 바쁜 노 후보의 발목을 붙잡는 셈이다.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들은 노 후보의 지지율이 낮아서 안 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넉달 여 동안 자기당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애쓴 적이 없다. 오히려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데 열심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민주당이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국민경선으로 뽑은 자당 후보의 지지율이 낮으면 높이도록 노력했어야 마땅하다. 노력하고도 안 되면 야당하고, 야당하면서 다시 국민의 지지를 얻어 여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국가의 정당정치다.
이치가 이렇듯 자명하거늘 정권을 계속 잡지 않으면 무슨 나라의 ‘역적’이라도 되는 양 온갖 소동을 빚고 있으니 과연 역사가 어떻게 기록할지 모를 일이다. 하물며 ‘반창(反昌)연대’를 위해 후보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몇몇은 한나라당으로 간다고 하니 더 무슨 말을 하랴.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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