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침조약이란 국가간에 서로 무력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조약이다. 군사동맹이나 상호원조조약이 제3국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한 군사적 대비 조치라면, 불가침조약은 서로간의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불가침조약은 흔히 조약 당사국의 정치적 군사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고, 또 위반시 효과적인 제재 수단도 갖지 못한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불가침조약은 어느 일방에 의해 파기되기가 일쑤였다. 모든 전쟁을 불법화하고 전쟁포기를 선언한 파리조약(1928), 독일-폴란드 불가침(1934), 독일-소련 불가침(1939), 일본-소련 불가침조약(1941) 등이 모두 파기돼 당사국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남북한도 1992년 ‘남북 사이에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통해 상대방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분쟁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불가침 구역은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북한은 불가침 약속 이후에도 해상, 수중 침투를 중단하지 않았고 우리의 북방한계선(NLL)을 불법 침범했던 것은 다반사였다. 불가침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1999년 연평해전이나 올 6월 서해교전 사태는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런 북한이 지금 다시 미국에 대해 불가침조약 체결을 들고 나왔다. 미국에 의해 ‘악의 축’으로 규정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이라는 치명적인 약속 위반 문제는 그대로 놔둔 채 먼저 미국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위협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이 같은 억지를 부리는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북한은 미국의 불가침 확약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10년 전 남북한간의 불가침 약속과 비핵화공동선언, 그리고 8년 전 북-미 제네바 핵합의 등 이미 맺은 합의사항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것이다.
박용옥 객원논설위원 전 국방부 차관 yongok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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