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나성린/국정원 예산 철저한 심의를

  • 입력 2002년 11월 7일 18시 42분


그동안 거론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던 국가정보원의 예산에 대한 예·결산심의를 이제는 제대로 할 때가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지난 4년 동안 상환불능 공적자금까지 포함해 125조원 이상 늘어난 천문학적인 규모의 국가부채를 줄여 재정의 건전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해 불요불급한 정부지출은 줄이고, 또 배정된 예산은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이러한 정책의 시급성에 따라 국정원 예산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작금의 분위기다.

▼편법배정-용도外 집행 드러나▼

물론 국정원의 모든 예산이 의혹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국정원의 예산은 크게 국정원 본예산, 기획예산처의 예비비에 숨겨진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활동경비’, 그리고 각 부처 예산 중 ‘특수활동비로 분류된 정보예산의 상당 부분’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모든 예산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국회 예·결산위원회의 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고 국회 정보위원회가 비공개로 예·결산 심의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중 문제가 되는 부분은 편법으로 기획예산처의 예비비에 숨겨진 활동비가 예비비라는 특성 때문에 예산 심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그 타당성에 대해 아무런 검증이 이뤄지지 않을 뿐 아니라 결산 때에도 총액으로만 심의되어 감시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이다. 본래 예비비는 당초 예산을 편성할 때 예측할 수 없던 예산 이외의 지출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다. 국정원이 40년간 지속적으로 이를 자신들의 활동경비로 사용해 왔다는 것은 예비비의 목적에 분명 위배되는 것이다. 정부 각 부처의 특수활동비 또한 국회 각 소관부처 상임위에서 예·결산 심의를 하고 있지만 그 근거가 제대로 제시되지 않아 실효성 있는 심의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이 이렇게 편법으로 예산을 운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국정원의 전반적 활동을 유추할 수 있는 전체 예산규모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안보·첩보 행위의 특성상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비용을 자유롭게 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국정원의 이러한 편법적인 예산 배정과 불투명한 예산 집행에 대해선 사실 그동안 기획예산처에서도 부담을 느끼고 간헐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갑자기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 데는 국정원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국정원장이 대통령 아들에게 돈을 건넨 사건, 1995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예산이 선거자금으로 전용된 의혹 등과 같이 국정원 예산이 본래의 국가안보를 위한 목적 외에 다른 잘못된 용도로 쓰인 사례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정원 예산의 대부분이 본래의 목적대로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쓰여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국민이 국정원 예산의 일정 부분이 잘못 사용됐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갖는다면, 애초 그러한 의혹이 생겨나지 않도록 제도를 보완하는 것이 국가안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방만한 예산 불법전용 없애야▼

이를 위해선 국정원 예산 전체 규모의 비공개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국정원의 모든 예산을 국회가 실제로 심의할 수 있고, 기획예산처 관계자와 국회 정보위가 예산의 전체 규모와 변화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국정원이 사용하는 경비를 기획예산처나 다른 부처에 편법으로 숨겨 놓을 것이 아니라, 국정원 예산의 예비비 항목으로 일단 몰아서 비공개로 편성하고 그것을 다시 전체 예산의 예비비 항목에 편입해 놓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용명세에 대해선 국회 정보위의 비공개 결산심의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무조건 총액 기준으로 할 게 아니라 항목에 따라 세부명세를 공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정원 예산 전체가 실질적 심사를 받게 됨으로써 방만한 예산 증액이 힘들어지고 이전보다 불법 전용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국정원도 내부적으로나 납세자들에 대해 떳떳할 수 있다.

나성린 한양대 교수·경제학·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