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는 선후가 뒤바뀐 잘못된 현상이다. 수사나 구속여부가 아니라, 오히려 유무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유죄를 인정한다면 그 형량이 적정한 것인지, 그에 대한 집행유예가 적절하고 형평성이 있는 것인지 등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감시해야 할 것이다. 진실발견을 토대로 한 국가형벌권의 실현과 사법정의는 사법부의 판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평성 어긋난 溫情的 법잣대▼
국가가 범죄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목적은 범죄예방의 효과를 얻기 위함도 있다. 그렇다고 형벌이 중하면 중할수록 그 효과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범죄 있는 곳에 반드시 형벌이 뒤따르고 그 형벌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엄정해야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 있다. 유전(有錢)이면 무죄이고 권력의 주변에라도 있으면 처벌을 피해갈 수 있는데 반해 무전(無錢)이면 유죄이고 힘이 없으면 차가운 감옥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면, 누가 자신의 감옥행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속죄의 나날을 보낼 수 있겠는가. 자신만 운이 나빠 법망에 걸려들었고 설사 걸려들었더라도 조금만 참으면 보석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사법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겠는가. 법이 누구에게는 펄펄 살아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눈치를 살피면서 주저한다면 이는 법의 효력과 사법정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결국 범죄예방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
구속하거나 기소함에 있어서도, 또한 형을 선고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물은 어느 그릇에 옮겨 담든 평평함을 유지하듯이, 법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와 닿아야 한다. 눈을 안대(眼帶)로 가리고 한 손에 칼을 든 정의의 여신처럼 정의를 실현함에 있어서는 칼처럼 힘있고 단호하게, 그러나 법의 심판대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듯이 아무런 사심(私心)이 없어야 한다. 피의자나 피고인이 대통령의 아들이건, 정치인이건, 군 장성이건, 고위 공직자건, 대학교수건, 아니면 평범한 소시민이건 법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김홍걸씨가 특가법상 알선수재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 2년에 3년의 집행유예로 석방된 것에 대해 국민은 ‘역시 그는 대통령의 아들이었지’라는 반응이다. 수십억원의 금품을 받고도 풀려난 것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재판부가 고려한 집행유예 선고의 참작사유가 그 자체로는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범죄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가담했고 이권청탁도 없었다는 사실 등이 관대한 처벌의 근거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6개월의 수감생활, 대통령 가족의 실추된 명예와 고통, 형제 동시 수감시의 가족의 불행 등 피고인의 개인적인 사정이 지나치게, 다른 범죄유형이나 범죄자와는 달리 온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권력형 부정부패에 대한 수사도 미온적이고, 기소율도 낮고, 기소해도 형량이 관대하며, 게다가 거의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현실은 일반국민에게는 또 다른 차별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가 대통령의 친인척이나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이었더라도 동일한 판결이 내려졌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의 미온적인 사법처리와 관대하고 온정적인 형 선고로 쌓여진 국민적 불신의 표현일 것이다.
▼말뿐인 ˝권력비리 엄단˝▼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나 권력형 부정부패가 판박이처럼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권력형비리 감시와 비리 수사를 위한 법 규정과 제도가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짜여 있어야 하지만, 수사와 재판도 엄정하고 공평해야 한다. 결국 풀려나고 사면되고 복권되는 온정적인 법 적용과 집행으로는 비리와 부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태훈 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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