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취임 100일 신인령 이화여대 총장

  • 입력 2002년 11월 12일 18시 16분


신인령 총장
신인령 총장
<8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총장 이·취임식. 여느 총장 이·취임 행사와 달리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날 행사가 관심을 모은 것은 퇴임하는 장상(장상) 총장이 총리 인준 부결 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심의 또 다른 축은 신임 총장인 신인령(신인령·59) 교수. 그는 ‘노동운동가 출신 총장’ ‘첫 비(비)유학파 총장’ 등으로 불리는 ‘뉴스 메이커’이다.>

취임 후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꽁꽁 숨어버린 신 총장을 정확히 취임 100일째인 8일 이화여대 총장실에서 만났다. 인터뷰 시작 전 낙엽이 지는 교정에서 사진기자의 요구대로 이 포즈 저 포즈 열심히 취하고 있는 신 총장을 보니 얼마 전까지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하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인터뷰 도중 기자가 말을 끊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혼자 술술 얘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모습에서도 그렇다.

그는 자신을 ‘내성적 성격’이라고 평하며 “앞에 나서기보다는 옆이나 뒤에서 일할 때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위 여건상 전면에 등장해야 할 때 그는 결코 주뼛거리지 않는다. 이것이 과거 ‘운동’할 때나 총장이 된 후에나 다름없이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1.노동현장에 뛰어들다

신 총장은 70년대 노동현장에서 열심히 뛰었으며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화여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며 근로자 인권향상을 위한 진보적 성향의 글을 다수 발표해 왔다. 그러나 과거 화려했던 운동 경력에 대해 물어보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확고한 주장과 신념을 말하는 대신 그는 “내가 하던 게 운동이었는지도 몰랐다”고 답한다.

“당시 사회참여 활동이 ‘운동’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정부의 탄압을 받다보니 갑자기 ‘운동’이 되어버린 거지요.”

이화여대 동창들의 평가는 어떨까. 차명희 전 여성특별위원회 사무처장은 신 총장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라며 “평소 조용하다가도 핵심을 찔러 얘기하면 모두들 주목하곤 했다”고 회상한다.

‘63세대’인 신 총장은 법대 학생회장을 맡으며 이화여대가 한일 굴욕외교 반대시위에 적극 나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메이퀸’의 이미지가 강했던 이화여대를 바라보는 대학가의 인식이 바뀐 것은 물론 이화여대 당국자들도 깜짝 놀랐다. 학교 당국의 만류에도 ‘운동’을 계속한 그는 결국 정학을 당해 친구들보다 1년 늦게 대학을 졸업했다.

업 후 그는 60∼70년대 유명했던 사회교육단체인 크리스챤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노동분과 간사였던 그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노조민주화 교육을 했다. 교육 내용이 특별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교육받는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과격한 노동운동을 벌였다.

79년 3월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실에서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들이 그에게 피하라고 권했지만 숨길 게 없다고 생각한 그는 “뭘 도와드릴까요” 하며 중정 요원들을 맞았다. “확인할 게 있으니 따라가면 잠시 후에 나올 수 있다”는 요원들의 말을 믿고 남산으로 간 그는 11달 후에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출소 후 그는 한동안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큰일을 하다가 감옥에 간 것도 아닌데 주위에서 반독재 투쟁 영웅 대접을 해주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운동 경력에 대한 부담감은 총장이 된 지금도 계속된다.

“저의 직업은 사회운동 교육자였고 저는 성실하게 제 직업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노동법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노동자들로부터 직접 배운 제가 혜택을 받았지요. 지금도 ‘노동운동가 출신’이라는 사실이 너무 부각되면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당시 진짜로 고생하던 분들에게 미안해서요.”

#2.“총장은 ‘인재 조정자’”

그에게는 두 번의 유학 기회가 있었다. 75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서독 본부가 추천한 인권단체에서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당시 대학원 졸업 후 노동자 교육에 사명감을 느끼던 그에게 외국 유학은 전혀 매력적인 제의가 아니었다. 아는 것만큼 실천하고 싶었던 그는 오히려 유학 가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했다.

80년 서독의 또 다른 인권기구로부터 유학 제의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집행유예 상태였던 그에게 정부가 번번이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유학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별다른 후회는 없다. ‘국제화 시대에 국내파 총장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일부 지적에 대해 그는 자신의 역할을 “인재 조정자”라고 답한다.

“조직의 최고책임자의 역할은 ‘지도자’가 아니라 ‘조정자’라고 봅니다. 만약 제가 유학 경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된다면 다른 유학파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함께 일하면 되지요. 제가 총장으로 있는 동안은 효율성이 무시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배경의 인재들을 발굴해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적 경영방식을 택할 것입니다.”

대학 총장의 능력이 외부에서 끌어들이는 돈의 액수로 평가받는 시대다. 혹시 신 총장의 운동권 경력이 기금 모금에 해가 되지 않을까 궁금하다. 그는 “총장 얼굴보다는 대학 프로그램을 보고 투자하라고 설득하겠다”면서 “이를 위해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중복되는 학문 분야는 통폐합하고 정보통신 생명공학 국제학 등에는 지원을 늘려나가겠다”고 답한다.

#3.‘베스트 티처’ 총장

그는 노동운동가가 될 때처럼 총장의 자리도 당초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사회가 신인령 교수를 비롯한 3명의 후보를 놓고 신임 총장을 결정하던 날 그는 운전을 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학교를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할 테니까 총장 자리를 면하게 해주십시오.”

그가 총장 자리를 원치 않은 것은 막중한 책임감뿐만 아니라 강의를 못하게 되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해 이화여대 교무처가 선정하는 ‘베스트 티처’에 뽑힌 그는 “강의를 준비할 때마다 ‘1시간 강의를 위해 9시간을 준비하라’는 옛 스승의 충고를 떠올린다”고 말한다.

80년대 노동자의 시각에서 노동법을 해석하고 노동법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분석하는 그의 강의는 정원보다 60∼70명이 많은 학생들이 청강했을 정도로 ‘의식’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필수 과목으로 통했다.

그는 총장에 취임하는 날 언니와 남동생조차 초대하지 않았다. 이 행사는 친지들로부터 축하를 받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간사 시절 월급 8만원을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던 그의 ‘버릇’은 지금도 계속된다. 70년대 신 총장의 주선으로 독일 유학길에 올랐던 이상화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는 “주변에서는 미혼인 그에게 어느 정도 돈을 모아놔야 노후가 편하다고 하지만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면서 “도움이 필요한 주변 사람들을 위해 적금도 내놓은 사람”이라고 평한다.

인터뷰를 끝내기 전 그의 가슴을 울린 책 한 권을 얘기해 달라고 하자 그는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83년 출간)을 권한다. 분신 자살한 노동운동가의 삶을 다룬 이 책은 그에게 70년대 노동자의 현실에 눈뜨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 등 한국 노동법의 문제점을 깨닫게 해줬다고 한다. 이 책을 읽은 후 그는 글을 쓸 때 절대 한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학문은 단지 지식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유했을 때 가치를 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명숙 여성부 장관의 내 친구 신인령

"연애소설 즐기는 로맨티스트 학자"

내가 신인령 이화여대 총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이화여대 기숙사에서 일할 때였다. 신 총장은 당시 대학원 논문을 쓰기 위해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생각과 뜻이 같음을 확인하고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신 총장과의 인연은 크리스챤 아카데미로 이어져, 나는 여성교육을 받은 후 여성운동에 뛰어드는 생의 전환점을 맞았고 그는 노동교육에 헌신하는 소중한 삶을 살며 직장동료로서 한 길을 걷기도 했다.

신 총장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초지일관의 강한 여성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실천으로 보여 준 양심적인 학자다. 노동교육 현장에서 보여 준 그의 끝없는 열정과 애정은 모든 교육 참가자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고백컨대 나도 신 총장에게 반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한편 강인하게만 보이는 신 총장에게는 보통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로맨틱한 면이 있다.

그에게 취미가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소설 읽기’이고 다른 하나는 ‘인형 모으기’다. 아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신 총장은 소설을 꽤나 즐긴다. 휴식을 취하거나 여행갈 때, 언제나 소설책이 옆을 떠나지 않는다. 연애소설 속에 푹 빠져 있는 신 총장의 모습을 그려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소설 속의 주인공을 보듯이 신 총장의 아파트 작은 유리 서랍 안에는 여러 나라의 민속 인형들이 진열되어 있다. 나도 외국 출장을 갔다 올 때마다 민속 인형 하나씩을 보태곤 한다.

21세기의 새로운 지도력은 지식과 더불어 감수성과 지혜, 그리고 문화적 창의력으로부터 나온다. 신 총장은 이상과 현실을 균형 있게 실천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과 지혜, 그리고 문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에 이화여대 총장직을 훌륭히 해 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신인령 총장은…

△43년 강원 명주군 현 강릉시 출생

△67년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74년 이화여대 법학 석사

△85년 이화여대 법학 박사, 이화여대 법학과 교수

△2000∼2002년 이화여대 법대 학장

△2002년 8월 이화여대 총장

△71∼80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교육간사

△99년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

△2001년∼현재 한국노동법학회 회장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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