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수진/'막가는'국회 '모른체'후보

  • 입력 2002년 11월 14일 18시 33분


가을이라는 계절 탓인지, 아니면 선거철 탓인지 온갖 정치 철새들이 깃들일 곳을 찾아 잿빛 정치권을 우왕좌왕한다. 이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마음도 덩달아 스산해지고 착잡해진다. ‘민주화 이행’ 이후 15년이 흐른 한국 정치에 음습한 겨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각 당 후보들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국회의원들은 자기 당 후보가 벌이는 필사적인 노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행태를 연일 반복해서 연출하고 있다.

▼정치개혁 팽개친 저질 의원들▼

국민의 신뢰와 기대가 대한민국 국회를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국회는 ‘개그콘서트’를 능가하는 3류 코미디로 국민의 시선을 붙들어보려 한다. 우리 선량들은 정족수도 채우지 못한 국회 본회의에서 무더기로 법안을 통과시키고도 태연자약하더니, 이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빗발치자 이를 재의결하겠다고 모여서는 대리투표를 서로 부탁하는 꼴불견을 연출했다. 초등학교 학급회의보다 못한 일들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그것도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선량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TV코미디에 비유하는 것은 코미디언들에 대한 모독이다. 코미디언들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선량들은 유권자들을 실망시키는 일들만 용케도 골라서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급기야 한국의 국정을 책임져야 할 대통령 후보들을 새빨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선거를 앞두고 열린 무수한 방송토론에서, 각 당이 발간한 숱한 공약집에서, 또 언론사와 시민단체들이 보냈던 많은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통해, 대통령 후보들은 한결같이 한국 정치의 낙후성에 개탄하고 정치개혁의 절박성에 강력한 지지와 공감을 표명한 바 있다. 대통령 자신과 친인척을 중심으로 반복되어 온 부패의 사슬을 과감하게 끊기 위한 개혁, 돈 선거를 줄이고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개혁, 대통령 권한의 남용을 견제하고 국회의 권한과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정당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 등 빈사상태에 빠진 한국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절박한 개혁의제들에 관해 후보들은 정파의 구별 없이 한 목소리로 개혁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정기국회가 막을 내린 이제 이들의 약속은 모두 헛된 공염불이 되어버렸다. 정기국회 회기를 100일 ‘이내’로 한다는 국회법을 악용해 선량들은 정기국회 회기를 예년보다 무려 30일 이상 단축해 버렸다. 그리고는 막가파식 정쟁과 저질 코미디로 온갖 빈축을 사더니 정기국회 폐회를 1주일도 채 남겨 두지 않고 정치개혁법안 심의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하다. 부패방지법 개혁은 주군(主君)과 그 가족을 다치게 할 염려가 있으니 안 되겠다고 한 정파가 버텼다. 또 다른 정파는 음성적 정치자금의 거래를 차단하고 지나친 돈 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개혁을 못 하겠다고 응수했다. 그러자 상대 정파는 잘 됐다는 듯이 정치개혁은 모두 물 건너갔다고 선언했다.

국회에서 이처럼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데도 후보들은 ‘나 몰라라’하고 태연자약하게 사방으로 다니며 달콤한 말로 순진한 유권자들을 현혹한다. 3김 시대 이후의 한국 정치에 걸었던 기대와 희망이 지금 산산이 깨어져나가고 있다. 3김의 영향력이 수그러들자 그 동안 이들의 비호 하에 정치권력의 부스러기를 탐하고 다녔던 온갖 정상배들이 국회는 물론이요 정치권 전반에 걸쳐 분탕질을 치고 다니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을 연출하고 있다. 마피아 보스들을 모두 감옥에 넣었더니 뉴욕시의 치안이 안정되기는커녕 온갖 날건달이 기승을 부리는 통에 치안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꼴이다. 앞으로 5년 동안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지겠다는 후보들은 이들의 작태를 꾸짖고 바로잡으려 노력하지는 않고 오히려 한 마리의 미꾸라지라도 더 자기 밑으로 끌어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당선용 공약 내세우기 급급▼

대통령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요구되는 자질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실과 책임이 대통령의 필수 덕목인 반면 허위와 기만이 당선을 위해 요구되는 수단인지도 모른다. 이게 사실이라면 필자를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김수진 이화여대 교수·정치학·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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