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삶이 정치적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간단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아렌트는 정신의 삶에 관한 연구를 통해 어느 누구보다도 이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천착하고 있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는 개인적 삶과 정치적 삶의 공동성 및 차이를 부각시킨 저작들 중 마지막 저서이다.
만년의 아렌트는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는 정신의 삶을 ‘이야기하기’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내면적 공공영역과 외면적 공공영역의 공동 원리를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정치행위는 ‘소리 나는’ 대화를 통해 수행되지만, 정신 활동은 ‘무언의’ 대화로 진행된다. 양자의 차이는 단지 귀에 들리는 대화인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다. 나와 자아간의 소리 없는 대화가 ‘사유’이고, 자신의 의도를 시작하는 능력이 ‘의지’이지만, 아렌트는 사유와 의지의 난점을 해결하는 ‘판단’, 즉 상상 속의 타자와 나누는 대화의 기능에 주목했다.
‘정신의 삶: 사유/의지’에 관한 연구는 1973년 에버딘대학교 지포드 강의를 통해 완결되고 이후 출간되었지만, ‘판단’에 관한 연구는 그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중단되었다. 아쉽게도 판단에 관한 최종 연구는 아렌트가 70년 미국 뉴스쿨에서 한 칸트 강의로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일련의 강의를 통해 그동안 무시되었던 인간의 정신적 능력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우리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물론 정신 능력에 대한 설명 자체는 ‘판단’에서 종합되지 않을 경우 결함을 갖기 때문에 아렌트는 칸트 강의를 통해 이를 완결시켰다.
제1부에서는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쾌(快)와 불쾌(不快)의 관점에서 본 인생의 평가, 세상에 대한 관조적 인간의 적개심,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 진보와 개인적 자율성간의 긴장, 보편자와 특수자의 관계, 판단의 구속적 가능성 등을 밝힌 아렌트의 칸트 강의를 소개하고 있다. 제2부 베이너의 해설논문은 활동적 삶의 관점에서 고찰한 판단이론과 정신적 삶의 관점에서 고찰한 칸트 강의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논문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상상력 속에서 재현하는 판단의 정치적 특성을 드러내는 핵심 개념들, 즉 공통감(각), 상식, 의사소통, 인간적 품위, 확장된 정신, 취미, 불편부당성 등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기회를 제공한다. 베이너의 연구는 그의 판단이론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공동체 의식, 즉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일상적 표현의 진정한 정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판단능력의 발현을 제약하는 구조적 상황에서 심화되어 온 한국적 대립정치를 극복하는 지혜를 담고 있으며, 정신적 삶과 정치적 삶의 상호 의존성을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아렌트 연구가인 역자가 아렌트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돋보이는 역서다.
홍원표 한국외국어대 강사 정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