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변하지 않는 권력

  • 입력 2002년 11월 15일 18시 21분


왕자에서 거지로, 거지에서 왕으로 등극한 영국의 에드워드 6세는 거지 시절 겪었던 일들을 매일 이야기했다. 거지와 옷을 바꿔 입었다가 왕궁 앞 파수병들에게 매를 맞고 거리에 내동댕이쳐졌던 일이며 먹을 것이 없어 비참했던 순간,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신하들에게 늘어놓았다. 왕이 자꾸 이야기를 한 이유는 거지의 체험을 밑거름으로 해서 백성들에게 좋은 정치를 펴겠다던 당초의 결심을 새롭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에게 관대한 정치를 펼 때 신하들이 반대하면 그는 호통을 쳤다. “고통받고 억눌린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대들은 아는가. 나도 알고 백성도 알지만 그대들은 몰라.”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마크 트웨인의 세가지 질책▼

이 소설에서 왕과 백성은 같은 집단, 권력을 지닌 신하들은 그 반대 집단이다.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고통받은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왕도 거지 체험을 하고서야 백성들 처지에 눈을 뜬다. 소설은 권력자를 향해 세 가지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첫째 권력자들은 권력을 갖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고, 둘째는 고통과 억눌림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한 가지는 왕이 거지 체험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백성의 고통은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이내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배경인 16세기나, 트웨인이 소설을 썼던 1880년대와는 긴 세월의 격차가 있지만 권력자의 속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고, 트웨인의 세 가지 질책은 이 땅에서도 고통받고 억눌린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서울 한복판 검찰 청사에서 벌어진 고문치사 사건은 피해자가 조직폭력배라는 점에서 엇갈린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악의 근절’이 먼저인가, 인권이 먼저인가. 그럼에도 사건을 접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것은 가혹행위가 어찌 이번뿐이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검찰이라는 서슬 퍼런 거대 권력에 대한 근원적 불신과 체험적 산물이기도 했다.

사건이 공개된 후 자신도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 검찰의 ‘인권 시계’는 박종철군 물고문 사건 이후에도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권력이 변하기란 그토록 힘든 것인가.

트웨인의 접근법을 여기에 대입해 보자. 검찰은 고문하기에 앞서 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 따위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범죄에 대한 자백만 받아내면 됐기 때문이다. 수사관들은 고문을 당해본 적이 없었을 터이니 피의자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박종철군 사건과 같은 과거의 체험을 부단히 떠올리는 문제 역시 권력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배신감이 더 느껴지는 것은 인권을 강조해온 ‘국민의 정부’ 당사자들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가혹행위가 이들이 관심 쏟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국민이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개혁을 입버릇처럼 외쳤던 권력층이 왜 그렇게 비리를 많이 저질렀는지, 국회의원 세비를 올리는 데는 똘똘 뭉치면서도 법안 의결 때는 왜 멋대로 자리를 비우는지도 이젠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간략하게 말하면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로, 검찰은 검찰대로 각자 권력의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국민의 정부'의 겉과 속▼

어찌 이들뿐인가. 관공서에 드나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서비스 행정’이란 말이 사탕발림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공무원들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다고 어디 가서 하소연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서민들이다. 누구 말대로 관공서가 ‘미운 놈을 골라 손보려 할’ 경우에는 어쩔 것인가. 생각하면 권력이란 다 그런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새 지도자를 뽑는다. 사람들은 대통령을 바꾼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깊은 회의에 빠져 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포기하지 말고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자들이 한 번이라도 더 보통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한 번이라도 더 채찍질을 가할 것이므로.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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