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쪽빛바다 눈맞추면 쪽빛눈물이… '바다와술잔'

  • 입력 2002년 11월 15일 18시 23분


사진제공 화남
사진제공 화남
혹자는 잡문(雜文)이라 잘라 말하기도 하는 산문집에, 특히 작가의 산문집에 남다르게 눈길이 가는 까닭은 그것이 때로 ‘보물찾기’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즐겨 쓰는, 그러나 조금은 덜 가공된 재료를 맛볼 수도 있을뿐더러 때로는 고이 숨겨둔, 작품에 잇댈 수 있는 조각보를 찾아낼 수도 있다. 그로써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작가의 내밀한 삶의 한 자락.

작가 현기영(61·사진)이 ‘젊은 대지를 위하여’ 이후 13년 만에 펴낸 이 산문집에는 제주의 푸른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다. 책에 담긴 바다는 서정성이 응축된 대상이며 동시에 ‘젖줄 대고 자란 모태로서의 제주도와 그 아픈 비극’의 원천이기도 하다.

‘요즘의 뒤숭숭한 꿈자리를 용두암의 시원한 갯바람에 씻기 위해서, 내 몸 속의 죽음을 달래기 위해서, (…) 무량의 가득함으로 출렁이는 밀물의 바다를 만나기 위해서, 그 바다 앞에 서서 세속의 성취가 허무한 것임을 실감하기 위해서’(바다와 술잔) 그는 종종 고향으로 향한다.

작가는 지금까지 제주 4·3항쟁을 그린 ‘순이 삼촌’ ‘지상에 숟가락 하나’, 조선조 말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방성칠란과 이재수란을 다룬 ‘변방에 우짖는 새’ 등 일련의 소설을 통해 고향에서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여실히 보여왔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 ‘아버지’도 제주 4·3항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

그는 설명한다. ‘내 영혼은 아직도 고향이 던진 투망에 갇힌 채 조금도 벗어날 줄 모른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상륙 못하고 여태 제주섬에 머물고 있는 나 (…) 나의 문학적 전략은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게 하는 것, 즉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모순적 상황이 첨예한 양상으로 축약되어 있는 곳이므로, 고향 얘기를 함으로써 한반도의 보편적 상황의 진실에 접근해 보자는 것’(나의 문학적 비경 탐험)이라고….

이순을 넘긴 작가가 털어놓는, 성당에서 만난 첫사랑 소녀 마리아에 대한 아릿한 기억, ‘원죄와 같은 억압으로 잠재의식을 지배하는’ 제주 4·3항쟁의 후유증으로 자살한 고향 선배들에 대한 기억도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멈추게 한다.

서글픈 푸름의 한편에는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해온 이 시대의 작가로서 느끼는 단상이 날카롭게 빛난다. “작가는 자신의 시나 소설 외에 ‘비판적 에세이(Critical Essay)’를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적 형식에만 묶여서는 안 되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글을 때에 맞게 써야 한다.”

1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는 산문집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후배 문인들은 책제목처럼 ‘바다’ ‘술’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배에 실려 수평선을 넘는 꿈을 키우던 시절. 가세가 기울어 그 꿈을 날려보내야 했던 그는 대입시험을 보러 배타고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한 뒤 용두암 근처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자! 그때 그 절망과 슬픔을 위해서! 나는 술잔을 들어서 술의 수면을 쪽빛 바다의 수평선에 맞춘다. 술잔 속의 술이 바다의 쪽빛으로 물들고, 나는 그 쪽빛을 꿀꺽 들이켠다.’(바다와 술잔)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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