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1936년은 일제가 아시아침략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식민지였던 조선의 민중에게 손옹의 금메달 획득은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내걸며 침략을 정당화하던 일제로서는 ‘아시아적 가치’의 우월성을 선전하기에 딱 좋은 소재였다.
15일 일본의 조간 신문들은 손옹이 가슴에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인터뷰하는 당시 사진을 실었다. 일본인의 입장에선 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거느린 채 군림하던 ‘대일본제국’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는 사진이고 기사였다.
이 사진을 보면서 다시 가슴 한편을 아프게 만든 것은 손옹의 국적이었다. 한국이 당당히 세계 속의 국가로 자리잡은 오늘 이 시점에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공식기록에 손옹의 국적은 일본으로 돼 있기 때문이었다.
메달 획득자의 국적을 바꾸려면 일본올림픽조직위원회(JOC)가 IOC에 손옹의 국적 변경을 신청해야 하는데 JOC는 손옹이 생전에 거듭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해 왔다. 미국에서는 교민들의 노력으로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역대 올림픽 우승자 기념비와 올림픽 기념책자 등에 기록된 손옹의 국적이 한국으로 바로잡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IOC에 있는 원본이다. 원본의 국적이 바로잡혀야 한다.
입만 열면 신(新) 일한시대를 되뇌면서도 행동이 이를 받쳐주지 못하는 일본의 이중적 태도를 절감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아사히신문까지도 이날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서 “JOC는 너무나 냉정하다”고 비판했다.
일본은 정치와 이념, 종교를 초월한 올림픽 정신을 되돌아보고 지금이라도 손옹의 국적 변경을 IOC에 신청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동반자로서의 한일관계를 여는 길의 하나다.
조헌주 도쿄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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