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마라톤의 영웅, 민족의 자존심

  • 입력 2002년 11월 15일 18시 39분


고 손기정씨는 일제가 총칼로 조선을 강점하고 민족의 혼과 뿌리를 없애려고 했던 암흑기에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자존심과 민족 의식을 고취시킨 마라톤 영웅이다. 광복 후에는 선수 지도, 체육 외교 및 사회 활동을 통해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바가 크다. 90년 마라톤 인생을 쉼 없이 완주해 이제 평화롭게 잠든 고인에게 숙연한 마음으로 명복을 빈다.

손씨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인간의 한계로 인식되던 2시간30분 벽을 처음으로 깨고 금메달을 획득해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는 약소 민족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 2300만 조선 민중에게 감격을 선사한 큰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스포츠는 단순한 체육경기가 아니라 지배 민족을 압도해 식민지 민중의 울분을 푸는 유일한 합법 공간이고 도구였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 뒤 동아일보 사설이 ‘조선에서는 그것이 비록 한 개의 운동경기였지마는 자기의 최초 최대의 표현이었던 만큼 그 환희와 감격은 보다 크고 깊은 것이었다’라고 기록한 것은 그의 쾌거가 우리 민족에게 안겨 준 기쁨과 용기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준다.

메달 수여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동안 그는 시종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모든 조선 백성은 가슴에 일장기가 부착된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사진을 보며 다시 한번 나라 잃은 설움으로 비감해졌다. 당시 그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싶은 조선 민중의 염원을 반영해 동아일보는 손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해 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고 5명의 기자가 구속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 사건은 지금 격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국가 주권의 소중함을 늘 일깨워 주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마라톤 영웅은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달려 한계에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와 독립자강 민족사랑의 정신을 남겨 주고 떠났다. 이 같은 고인의 뜻을 기리고 이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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