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판결은 대기업 고급인력이 일정 조건이 갖춰지면 중견 혹은 벤처기업으로 옮기는 것을 사실상 인정한 것. 따라서 앞으로 전문경영인과 기술자들이 회사와 맺은 전직 금지 등의 약정에도 불구하고 ‘보다 자유롭게 이직(移職)’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서울고법 민사5부(양동관·梁東冠 부장판사)는 18일 삼성전자가 팬택의 이 사장을 상대로 낸 전업금지가처분 신청에서 원심대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이 사장이 (삼성에서) 담당했던 업무와 관련된 자료를 가져가지 않았고 무선 단말기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 이 사장이 현업을 떠나 1년간 미국연수를 받았다는 점에서 이미 전직금지기간을 넘긴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번 판결로 퇴직 후 1, 2년간 동일 업종에 재취업하거나 회사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는 ‘전직금지’나 ‘경업(競業)금지’ 등 기업약정은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재판부는 또 “퇴직 후 영업비밀유지기간을 장기간 인정할 경우 경제적 약자인 근로자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며 “3년간 동종업종에 취업할 수 없다는 원고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 사장은 삼성전자 이동통신 단말기 개발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애니콜’ 휴대전화기를 개발해 한국시장은 물론 해외시장까지 석권, 국내 이동통신 산업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장이 2000년 3월 돌연 삼성전자에 사표를 내고 이동통신 단말기 생산업체인 팬택 사장으로 전직하자 삼성이 부당 스카우트를 했다며 팬택을 제소했다. 이 사장은 삼성측의 항의가 계속되자 일단 삼성으로 복귀한 뒤 1년여간 미국 연수를 다녀왔으며 지난해 9월 다시 팬택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 사건은 대기업과 벤처기업간 우수인력 쟁탈전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관련업계의 주목을 끌어왔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